2010-06-29 후지패브릭 시무라 마사히코 '후지'로 돌아오다 (2)
2010년 6월 29일 야마나시일일신문
야구소년에게 싹튼 음악혼
라이브에서 '운명의 만남'
후지패브릭의 시무라 마사히코에게 오늘은 무얼 할 것인가 물으면, 당연한 듯 돌아오는 대답이, '일(곡만들기)입니다.'. 키보드나 기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CD가 정리되어 있는 동경의 자택 맨션에서 언제나 음악을 마주보고 있었다.
그 시무라가 파일에 넣어서 후지요시다의 고향집에 소중히 보관했던 것이 있다. 시모요시다 제1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자주 데려다 주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합의 티켓이나 팜플렛. 그리고, 또 하나. 소년야구 시합에서 자신이 활약했던 내용의 신문기사.
초등학교 2학년에 가라데를 시작한 시무라였지만, 학년이 올라감에 따라 야구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고향의 소년야구팀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싹트기는 하였으나, '조건'이 클리어되지 않아 포기하고 있었다. 고향집이 야채가게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설령 입단해도 토요일과 일요일의 시합에 데려다주고 마중 나오는 게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 중, 아버지 키요하루와 어머니 타에코의 귀에 소문이 들려왔다. '소년야구의 연습을 하고있는 남자아이들을, 시무라군이 멀리서 언제나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시무라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양친의 양해를 통해 후지요시다의 소년야구팀 '신마치'의 멤버가 되었다.
한결같이 연습
체력 쌓기를 겸해, 신문배달도 시작했다. 아버지 키요하루는 야채가게의 전등을 사용하면서 가게 앞에서 밤 늦게까지 아들과 캐치볼을 하고, 티 배팅도 함께 했다. 시무라는 '우익, 8번'의 포지션을 획득. 어머니 타에코는 '라이바치(우익수=라이트, 8번=하치방)군'이라고 마음속으로 이름을 붙여주고, 한결같이 야구를 마주하는 시무라를 지켜봐 주었다.
시무라의 파일에 소중히 남겨져 있는 신문기사 발췌. 1992년 7월 28일에 열린 야마니치 배 현 소년 야구 후지요시다 지구 대회 1회전 '신마치 대 중구 전'의 기록기사에는, 이런 한 구절이. ▽본루타 시무라 마사히코
시무라는 홈런을 치고, 팀의 승리에 공헌했다. 야구소년에게 있어 이 날의 일은 잊을수 없는 추억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프로의 "결정타"
할아버지는 전 아코디언 연주자, 아버지는 아마추어 밴드의 기타리스트, 어머니는 부인 코러스부에 소속되어 있는 등, 시무라에게 있어서 음악은 근처에 있는 것이었다. 시모요시다 중학교 졸업후도 야구를 계속했지만, 아버지로부터 기타의 기초를 배우고 서서히 음악에 빠져들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 같은 반이 된 남자 학생에, 와타나베 타카유키渡辺隆之와 와타나베 헤이조渡辺平蔵가 있었다. 와타나베 타카유키의 고향집은 섬유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회사 이름은 후지패브릭富士ファブリック. 요시다 고등학교 입학 후 알게 된 오마타小俣梓司, 시미즈 다카후미清水岳文를 더해, 후에 결성되게 되는 밴드 멤버의 첫 만남이었다.
와타나베 타카유키는 중학교 3학년 때 시무라를 후지큐 하이랜드 코니퍼 포레스토의 라이브에 데리고 갔다. 처음 간 라이브였다. 출연 아티스트는 오쿠다 타미오. 시무라는 고향집 가까이에서 열린 이 라이브가 당시 인상에 남았던 것일까, (오쿠다의) 기타 피크를 시작으로, 라이브 회장에서 구입한 물건의 내역을 그 날 기록했다.
'이 사람은 인생을 굉장히 즐겁게 보내고 있다는 게 전해져 왔다. 힘든 일이 있겠지만, 즐거운 일이 일어난다. 그런 음악가라는 게 멋있다고 생각했다.' 고향 후지요시다에서 오쿠다 타미오를 감싸고 있던 인상. 이 '첫 만남'이 프로에 뜻을 두는 결정타가 되었다.
沢登雄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