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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패브릭 4
フジファブリック 4
Katayose Akito
2010年7月13日
09:32
가을반부터 앨범 레코딩까지는 그 기세로 밀고 나갔다.
봄~가을반까지의 표제곡은 싱글이라는 것도 있으니 시무라군의 서정적인 멜로디에 초점을 맞추고, 자주 후지패브릭의 변태성이라고 불리는 매트하고 사이키델릭한 측면은 커플링곡에서, 그것도 요소로서 일부 드러나는 것에 머물고 있었으나, 앨범에서는 그의 다크 사이드를 전개할 수 있어서 나도 기대하고 있었다.
다만 한가지 걱정되는 것은 앨범용 악곡이 레코딩 전에 전부 갖춰지지 않았던 것. 통상 메이저 데뷔를 하는 밴드는 앨범 2장분 정도는 곡을 비축하고 있으나 후지패브릭은 달랐다. 이미 첫번째 앨범을 만들기에도 곡이 부족했다.
시무라군은 과작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자기 속에서 전부 납득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멜로디의 단편을 가지고 있더라도 아주 완강하게 레코딩을 거부했다.
첫번째 앨범 단계에서 우리들이 '이건 분명히 레코딩을 하면 확 변할테니까 해보자!'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아뇨, 아직 무리에요'라는 한마디로, 고개를 끄덕이려고 하지 않았던 악곡에는 훗날의 <도쿄염상>등이 있다.
그는 악곡에 그치지 않고 모든 일에 상당히 독자적인 고집을 가지고 사는 소년으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얘기를 듣는 것이 무엇보다도 싫은 사람이었기에 일단 나는 상태를 보기로 하고 다소 논의가 되지 않은 채 레코딩에 돌입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1개월은 거의 공동생활같은 것을 했다.
통상 정오에 집합하여 13시에 시작하는 레코딩이었으나, 싱글과는 달리 스튜디오에서 편곡을 마무리짓는 일도 많았기 때문에 앗 하는 사이 해돋이를 맞아버리고, 쪽잠을 잤다가 3시간 후에는 다시 스튜디오에 집합이라는 나날을 반복하는 사이 스튜디오를 좋아하는 시무라군은 집에 돌아가기보다 스튜디오에서 숙박하고 싶다고 말을 꺼냈다.
레코딩은 거의 텐노즈의 테라다 창고 안에 있었던 EMI 소유의 Terra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졌는데 여기에는 가혹한 작업을 겪는 어시스턴트 친구들을 위해 준비된 수면실과 샤워실이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방에 몇개의 침대가 놓여있을 뿐인 간소한 방이었지만 시무라군은 여기에 숙박하면서 무척 좋아하는 세븐일레븐의 도시락을 먹으면서 레코딩 종료후에도 편집을 생각하거나, 가사를 쓰거나 했었다.
나중엔 나도 집에 돌아가는 게 귀찮아져서 시무라군의 옆 침대에서 자는 날도 있었다. 마치 학창시절의 합숙같은 상황이었는데, 뮤지션이란 대학 4학년의 봄방학이 영원히 계속되는 듯한 감각으로 오늘까지 와버린 인간들의 집합인 것이다. 나도 정신연령은 분명히 마이너스 10세 정도일 거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나대로 시계바늘을 10년 거꾸로 돌린듯한 기분이라 조금 즐거웠다.
아무튼 시무라군은 세븐일레븐의 도시락을 좋아했다. 둘 다 큰 콜라를 좋아해서, 병콜라가 최고라고 하는 그의 의견에는 두손들어 찬성하는 나이지만 역시 세븐일레븐의 도시락만 먹어서는 몸에 나쁘지 않아? 라고 시무라군에게 조금 이의를 제기했더니 '아뇨, 카타요세씨, 세븐의 도시락은 안전하다구요. 봐요, 여기에 첨가물 없음 착색료 없음이라고 쓰여 있잖아요. 나 알바 했었으니까 잘 알아요.'라고 자랑스레 말했다. 늘 그렇듯 고집이 있는 모양이니까 그 이상은 반론하지 않기로 하고, 나는 그 때 얼린 바나나를 깨물었다.
참, 나는 이 앨범 레코딩중에 고기를 먹던 것을 그만두어 올해로 벌써 6년째가 되었다. 딱히 주의나 주장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지금도 가끔 어패류는 먹기도 하고, 물론 어떤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이건 내 몸과 마음의 건강에는 정말로 좋았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 해까지 건강에 좋지 않은 것을 반복하고, 거의 야채를 먹지 않고 육식 중의 육식생활을 해왔었으니까 분명 신체도 한계였을 것이다.
그런 사정으로 이 레코딩중에는 줄곧 과일만 먹었고, 저녁 때는 스튜디오 맞은편에 있는 카페에서 시저 샐러드를 먹었을 뿐이니까, 조금 통통한 느낌이 있었던 몸은 앨범 레코딩 중에 눈에 띄게 날씬해졌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은 깜짝 놀랄 정도로 맑아져, 식후에 졸려지는 것도 없어지고 작업에도 보다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시무라군은 점점 말라가는 나를 보고 '내가 제멋대로 구니까 카타요세씨가 말라간다'고 생각한 것 같지만 그건 엉뚱한 착각이다. 오히려 앨범 레코딩 쯤에는 난 무척 즐기면서 프로듀스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 멤버들을 만났더니 '야아~ 첫앨범 레코딩은 정말 힘들었어요~'라고 입을 모아 말했는데, 모두에게는 미안하지만 뒤돌아보면 내 속에 남아있는 것은 좋은 추억들만 잔뜩이다.
겨우 프로듀스에도 자신감을 가지게 되기 시작했고, 그것보다, 무엇보다 이렇게나 별로인 곡이 하나도 없는 밴드의 레코딩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같은 뮤지션으로서 즐겁지 않을 리가 없다. 감사하고 싶을 정도의 기분이었다.
편곡이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시무라군은 특유의 어두운 공기를 뿜어 자리를 얼어붙게 하는 일이 많았다. 때로 그런 장면도 자주 있었지만, 나는 무드 메이커로서 다들 가능한한 레코딩을 즐기고, 포지티브한 기분으로 지켜볼 수 있도록 쓸데없는 이야기를 연발하면서 체력의 한계까지 작업을 계속 진행했다.
그때까지 싱글로는 보여주지 않았던 후지패브릭의 중요한 측면을 표현한 곡으로서 꼽히는 것은 <TAIFU><우치아게 하나비><TOKYO MIDNIGHT>의 3곡일 것이다.
어느 곡이든 시무라군밖에 쓸 수 없는, 기묘하고 강렬한 넘버다.
그리고 이 3곡은 슈르한 가사도 강렬했다.
일견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되나 실은 묘하게 영상적인 풍경이 머릿속에 떠올라, 불현듯 정신이 들면 그의 굉장히 불가사의한 세계에 끌려들어가 거기서부터 자기자신의 뭔가 깊은 감정을 상기시키는, 마치 마법같은 가사였다.
이 곡들은 내 안에서는 Great3의 어느 측면과도 이어진 듯한, 다크 팝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작풍이었기에 그야말로 스스로의 감정이입도 쉬웠고 녹음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우치아게 하나비>를 레코딩하는데 있어 나는 Great3의 두번째~네번째 앨범에서 엔지니어를 담당해주었던 난세키 토시미씨를 불렀다. 그는 BLANKEY JET CITY의 하이로우즈, 에르마로등 일본의 록 명반을 다수 맡았던 명 엔지니어인데, 베테랑이 되어도 둥글어지지 않고 언제나 참신한 믹싱으로 뮤지션을 놀라게 해주는 일본의 데이브 프리드먼같은 남자다.
스파르타 로컬즈 등, 사무라군이 좋아하는 동세대의 밴드도 맡았던 적도 있어 작업은 실로 원활했다.
시무라군은 자기가 좋아하는 스파르타 곡의 사운드에 대해 난세키씨에게 질문공격을 하던 것이 기억난다.
난세키씨와는 설욕전이 되는 <벚꽃의 계절>의 재 레코딩도 진행했다.
시무라군의 리퀘스트로 아주 조금 템포를 늦추고 다이짱도 생 피아노에 도전한 앨범 버전. 이번에야말로 만족스러운 완성을 할 수 있었다.
<아지랑이> 믹스 시에도 마찬가지로 난세키씨의 솜씨에서 여러가지를 공부할 수 있었던 나와 엔지니어 카와즈라군은 그대로 남은 레코딩에 그 경험을 살리려고 분투했다. 초기 싱글 레코딩에서는 좀처럼 생각하는 사운드를 만들어내지 못했던 카와즈라군이었으나, 이 즈음부터 급속도로 솜씨가 늘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도 내가 추구하는 대역의 소리를 과부족없이 내줄만큼 성장해 있었다. (그도 지금은 9mm parabellum bullet 등을 담당하는 탁월한 엔지니어다)
또 어시스턴트 엔지니어를 담당해준 카미조군은 언제나 많은 CD를 껴안고 스튜디오에 오는, 멤버들과 동년배인 센스 좋은 음악을 좋아하는 젊은이로 특히 시무라군과는 아주 죽이 잘 맞는 듯 했다.
레코딩 후반에는 시무라군이 보다 릴랙스된 기분으로 보컬녹음에 도전할 수 있도록
카미조군과 둘이서만 레코딩을 시키기도 했다. 덕분에 호화로운 프로용 스튜디오에서의 레코딩이었지만 그가 자기 집에서 데모를 녹음해왔을 때처럼 긴장 없이 편안한 보컬 녹음도 가능했다.
<사보텐레코드>와 <꽃>은 스튜디오에서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물론 모티브가 되는 멜로디와 가사는 이미 시무라군 안에 있었지만, 언제나처럼 그의 안에서는 아직 레코딩할 퀄리티에 다다르지 않았던 듯 하다.
이대로는 앨범 완성에 곡이 모자라다는 위기감도 있고, 특히 <사보텐레코드>는 내가 시무라군에게 강하게 요청해서 레코딩하기로 결정한 곡이었다.
다들 의견을 모아 만들어낸 편곡은, 조금 비틀즈스러운 테이스트와 나도 스스로의 곡에서 자주 썼던 사비에서의 리듬체인지가 핵심이었다.
평소에는 신중한 시무라군이 드물게 바로 편곡을 정리해내어 그 자리에서 레코딩을 스타트했다.
기본적으로 펑크, 뉴웨이브를 가치관의 중심에 두고 자라온 나는 아무래도 기타솔로라는 것에 흥미가 없기도 했는데 (닐 영과 피트 다운센트의 기타 솔로는 좋아했지만) <사보텐레코드>의 엔딩에서 들리는 소우군의 기타 솔로에는 몇번을 들어도 가슴이 들떠 날아오를 것처럼 된다.
그는 어릴 때 센티멘탈 시티 로맨스의 명 기타리스트 나카노 토쿠오씨에게 귀여움을 받았다고 하는데, 센티나 슈가베이비등을 방불케하는 그 기타 솔로가 30년의 시간을 넘어 22세 동안의 젊은이의 손끝에서 유려하게 흘러나오는 모습에는 조금 흥분됐다.
<꽃>은 우선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소우군과 시무라군의 어쿠스틱 기타 2대로 녹음해보자고 제안하여, 그것이 효과를 거둔 작품이었다.
내가 아끼는 Gibson J-50의 음색이 마음에 든 시무라군은 '이거 갖고 있기만 해도 곡을 몇곡이나 쓸 수 있을 거 같아요' 라고 말하며, 그 기타를 껴안고 좀처럼 돌려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크레딧은 되어 있지 않으나 뒷부분에 들리는 하모니카를 부는 것이 나로, 집에서 녹음한 듯한 친밀한 분위기를 내기 위해 넣은 노이즈는 윈드 브레이커를 입은 다이짱이 스튜디오를 돌아다니면서 낸 소리였다.
소우군은 그 나이답지 않은 기타 테크닉을 밴드 속에서 어떻게 살려가야하는가, 답을 찾아내고 있었다.
<꽃>에서 들리는 어쿠스틱 기타도 도무지 원테이크로 녹음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완성도로, 악곡에 대한 적확한 어프로치를 궤뚫어본 뛰어난 감에 놀랐다. 그의 코드에 대한 절묘한 보이싱은 지금 들어도 훌륭하다.
소우군뿐만 아니라, 앨범 레코딩을 통틀어 멤버 전원이 급격히 두드러진 성장을 보여줬었다.
초반 아다치군은 머릿속에서 리듬을 이론적으로 해석하고 나서가 아니면 드러밍에 집중할 수가 없어져버리기도 했는데, 시무라군의 '닷치맨, 좀더 록으로!'라는 부추김에 답해 점점 그 껍질을 부수고 보다 어그레시브하고 육체적인 드러머로의 변모를 이뤄내고 있었다.
카토군은 실로 멋진 베이스 센스의 소유자로, 그가 생각하는 베이스 라인에는 시무라군도 한 수 접고 있었다.
처음에는 성격처럼 나서려고 하지 않는 다소 소극적인 플레이를 했었으나, 레코딩 후반에는 이것이 또 성격대로, 실로 딥하고 농후한 플레이를 들려주려고 하게 되었다.
그는 곡 속에서 저음이 어떤 멜로디를 대위선율로 연주하면 효과적인지 생각할 수 있는 펑키하고 멜로디어스한 베이스 플레이어로 성장하고 있었다.
카나자와군에 이르러서는 '자네 진짜로는 몇살인거야?'라고 무심코 물어보고 싶어지는, 최고로 시대착오적이고 개성적인 키보드 플레이로 앨범을 큼직하게 채색해주었다.
나는 소년시절에 Elvis Costello & The Attractions의 스티브 나이브가 연주하는 콤포 오르간의 음색으로 록 키보드에 눈을 떴는데, 분명 카나자와군의 삐-삐- 울리는 오르간의 음색으로 키보드가 들어간 록밴드의 멋짐에 눈을 떴던 소년소녀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후지패브릭을 다른 동세대의 밴드와 차별화할 수 있는 커다란 포인트가 된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중에 후지패브릭은 프로그레시브적 요소를 가진 밴드라고도 평가받았던 듯 한데 이 요소의 많은 부분은 다이짱이 마침 타고났던 자질이 컸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신곡이 좀처럼 완성되지 않는 동안, 나는 인디반에 수록되었던 곡도 틀림없이 좀더 좋게 다시 녹음할 수 있을테니 해보지 않을래? 라고 제안했으나, 데뷔 직전에 <아라모르트>라고 하는 인디 시절의 곡을 재록한 프리 데뷔반을 냈던 것도 있어서 시무라군은 '그러네요...'라며 회가 동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 날 '카타요세씨. <追ってけ 追ってけ>를 같이 하죠!'라고 말을 해 와서 놀랐다. 그가 말하길 '이 곡은 카타요세씨랑 하면 분명히 굉장해질거라고 생각해서요'라는 것이었다. '카타요세씨 좋을대로 해버려도 괜찮아요!' 라고 또 다시 생경한 말을 한다.
물론 나는 정말 좋아하는 곡이었으니 때마침 잘됐다고 생각해서 얼른 레코딩에 착수했다.
<追ってけ 追ってけ>는 라이브에서 자주 해서 익숙해진 넘버였으므로 베이직 녹음은 실로 스무스했다. 카토군의 베이스를 특히 초저음이 나오도록 세팅하고, 다이짱의 더 도어즈를 생각나게 하는 오르간의 음색도 훌륭하게 맞아떨어졌다.
'좋을대로 해도 괜찮다'라는 시무라군의 말은 내게 있어 도전이라고 여겨졌고. 시험해보고 있는 걸까? 라고도 생각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믹스 시에 나는 빈티지 리듬 박스를 몇종류인가 한꺼번에 켜서, 우연히 좋은 그루브가 된 부분을 잘라다 루프로 만들어 삽입하거나, 여러가지 이펙트 등을 살짝 더빙하고, 가끔은 연주를 뮤트하거나, 베이스를 부스트시키기도 하면서 마음껏 믹싱을 했다.
완성본을 들은 시무라군이 '우와~ 좋네요! 최고에요!!'라고 기뻐해줘서 나도 정말로 기뻤다.
그리고 드디어 레코딩은 앨범 라스트를 장식하는 '밤기차'로 끝을 맺으려 하고 있었다. 이 곡도 실로 아름다웠다. 스트링이 연주해야할 라인을 기타 솔로로 표현한 것도 비용은 적게 들었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사실 시무라군은 미디나 시퀀서 등의 디지털적인 요소를 첫번째 레코딩 단계부터 밴드에 도입하고 싶다고 내게 뜻을 보여왔었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이 첫번째 앨범까지는 멤버들의 사운드만으로, 그리고 아날로그적인 소리로 만들어내야 한다고 강하게 생각했었다.
일반 기타 밴드과는 다르게 굉장한 솜씨의 키보디스트가 있기도 하고, 자신들만으로 불가능한 것은 하나도 없다. 미디 등은 나중에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선은 내고 싶은 사운드가 있다면 그것을 자신들이 가능한 악기만으로 어떻게든 표현하면 되지 않는가.
분명 초기 비틀즈도 머릿속에서 울리던 R&B나 모타운 사운드를 무리해서 그 4명으로 표현하려고 했던 결과 태어난 새로운 사운드였음이 틀림없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시무라군에게 했던 것 같다.
호화로운 스트링으로 표현해야할 라인을 몇겹이나 다중녹음한 시무라군의 목소리로 표현했던 <벌레의 축제>등은 그 정신의 진면목이었다.
시무라군은 엄청나게 광적인 코러스 매니아였다.
나도 하모니에는 고집이 있어서, 둘이서 상당히 참신한 하모니를 많이 만들었었다. 시무라군은 정말이지 머릿속에 스트링이나 호른 세션을 연주하는 듯한 기분으로 하모니 멜로디를 생각하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그것은 내게 있어서도 큰 자극이 되었다.
엔딩을 장식하는데 어울리는 이 아름다운 곡을 무사히 완성시킨 순간, 시계 바늘은 아직 심야 0시를 돌기 전이었다.
그 고양된 기분 그대로 전원이 밤의 시부야에 뒷풀이 기분으로 몰려나갔던 것도 지금이 되어서는 그리운 추억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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