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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패브릭 1

フジファブリック1

Katayose Akito

2010年7月11日

19:16


시무라군이 돌연 여행을 떠난 후 빠르게도 반년이 지났다. 

나는 아마, 아직도 그 사실을 제대로 마주할 수 없는 채일 것이다. 

그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감정을 컨트롤할 수가 없어져, 눈물이 멈추지 않게 되어버릴 것 같은 스스로가 한심하다. 

아직도 박스셋도 싱글집도, 그리고 그가 남긴 신작 <MUSIC>도 들을 수 없다니,

칭찬받길 좋아하는 그는 결코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가 만드는 음악이 정말로 좋았다. 

 

처음 만난 것은 2003년 여름 초입이었던 것 같다. 

그 때 나는 Great3이 레코드 계약에서도 매니지먼트 계약에서도 벗어난 것도 있고 해서,

콤프레서를 만들거나, 광고 나레이션을 하거나 여러가지 일을 하면서 미래의 비전이 불투명한 나날을

어찌어찌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Great3의 담당 디렉터였던 코르그 야마모토씨 (바로 그 무그 야마모토씨의 동생이다) 로부터 전화로

"EMI의 신인 밴드가 프로듀서를 찾고 있는데 카타요세군 흥미 있어?

음악은 조금 진심 브라더스 풍이려나?!" 같은 말을 듣고, 일단 EMI에 가서 음악을 들어봤던 것이다. 

 

처음으로 들었던 <꽃집아가씨>, 이 1곡으로 나는 후지패브릭을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확실히 목소리는 조금 쿠라모치군이나 타미오씨를 생각나게 했지만, 음악성은 완전히 달랐다. 

쾅쾅 쳐대는 듯한 피아노를 축으로, 성급한 비트로 달려나가면서도 가슴을 마구 긁어대는 마이너조의 멜로디,

마르코스 발레를 생각나게 하는 간주의 피아노 프레이즈의 절묘한 센스에도 공감할 수 있었다. 

'만약 좀더 훌륭한 사운드로 완성하게 되면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울면서 춤추는,

그러나 뒤틀려있는, 전대미문의 음악으로 변모할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느꼈다. 

담당 디렉터라고 소개받은 이마무라군은 겉보기에 어떻게 봐도 시부야에 무리지어 있는 대학생,

자칫하면 건방진 고교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젊은이였으나, 그런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그의 음악에 대한 뜨거운 마음과

후지패브릭에의 애정에도 마음이 움직여 나는 꼭 하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즉답했던 것이었다. 

 

그날밤 집으로 돌아와 아내인 쇼콜라에게 ' 이런 밴드를 프로듀싱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가방에서 CD를

꺼내려고 하는 순간에, 켜둔 채였던 거실 TV에서 <꽃집아가씨>의 뮤직비디오가 나왔던 것도 잊혀지지 않는다. 

분명 채널은 TVK였던 것 같다. 진부하지만, 조금 운명의 흐름을 느꼈던 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EMI에서 시무라군과 카나자와군과 얼굴을 마주하는 날이 왔다. 

나는 그들이 좋아하지 않을까 싶은 곡을 제멋대로 컴파일해서 만든 MIX CDR을 가지고 갔다. 

아마 분명히 60년대의 오래된 음악부터 당시 맘에 들었던 <House of Jealous Lovers>를 낸지 얼마 안 된

The Rapture나 Flaming Lips등, 여러가지를 넣어서. 

 

무엇을 이야기했었는지는 그다지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히 시무라군은 나 아니면 오리지날 러브의 다지마 군에게 프로듀스를 부탁하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이야기해줬었다.

카나자와군이 나도 존경하는 키보디스트, 오가와 분메이씨의 제자라고 듣고 놀라는 한편 납득되었다. 

나는 얼마나 후지패브릭의 음악이 마음에 들었는지 속내 그대로를 이야기했다. 

 

브라질 음악을 좋아하니 인디즈 시절의 수수한 사운드도 좋지만, 앞으로 만들 사운드는 지금까지보다

더 엣지를 세운 록사운드로 해야 한다는 비전으로 의견의 일치를 본 우리들은

먼저 같이 스튜디오에 들어가보자고 결정했다. 

 

그 후 신주쿠 LOFT에서 열린 인디반 <아라모드> 발매기념 라이브를 방문, 아직 미완성이면서도

재기 넘치는 라이브도 만끽했다. 

그날 밤 함께 공연했던 메렝게, 잔상카페라는 밴드도 처음 봤는데, 윗세대라면 스피츠,

우리들 세대라면 서니데이 서비스가 체현했던듯한 요소를 또 다른 형태로 유니크하게

제시하는 밴드가 있구나 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조금 아래 세대라면 ZAZEN BOYS나 쿠루리 등을 늘 멋지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또 그 아래로부터

재미있는 세대가 계속 나타나는 것을 실감했던 밤이었다. 


그 이래 같이 스튜디오에 들어갈 때까지의 짧은 사이에 후지패브릭은 변화를 겪었다. 

동향이며 시무라군의 친구였던 드러머, 타카상.

시무라군이 그가 두드려내는, 어떤 점에선 '구수한' 비트센스를 아주 좋아했던 걸 나는 알고 있다. 인간성도 최고였다. 

그러나 애써 그와 이별을 고하고 보다 록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아다치 후사후미군을 새 드러머의 자리에 앉히게 된다.

그리고 자기보다 테크닉적으로 우수한 또 한사람의 기타리스트를 구해 야마우치 소우이치로군을 가입시켰다. 

이렇게 메이저 초기의 5인의 멤버가 모두 모이게 된 것이다. 

 

데뷔를 향하며 마침내 결정된 소속사무소가 Hit&Run이었던 것에도 인연을 느꼈다. 

나는 원래 롯텐하츠라는 밴드로 데뷔하여 당시는 Hit&Run의 모기업이었던 SMA에 소속되어 있었기에

하라다씨도 알고있었고, 무엇보다 치프 매니저 야마키시 켄, 통칭 '야마켄'은 내가 가입하기 전

인스트트루멘틀 개러지 밴드 시절의 The Great 3 에서 메인을 맡고 있던 남자이니까. 

 

첫 싱글 <벚꽃의 계절>의 레코딩은 지금 돌이켜보면 신인 밴드와 신인 프로듀서의 모험이었다.  

나아가서는 디렉터 이마무라군도 신인, 시무라군이 데려온 엔지니어인 카와즈라군도 거의 신인, 덤으로

현장 매니저 오오모리씨까지 신인이었으니까 재미있는 일이다. 

어쩌면 전원이 암중모색 상태인 악몽같은 상황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벚꽃의 계절>이라는 곡은 결코 싱글 지향의 화려한 멜로디를 가진 곡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일견 퉁명스러워보이는 시무라군의 목소리로 불리면 곧장 뇌리에 남는 신기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의 곡에 담겨있는 펑키한 요소가 매우 좋았는데, 이 곡도 구수한 펑키함이 핵심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거기에 얽혀드는 피아노가 중요해질 거라는 것은 데모에서부터도 명백했다. 

그것은 내게 채즈 쟌켈이 있었을 때의 이언 듀리 & 더 블록헤드를 연상시켰다. 

 

프로듀서에는 여러 타입의 사람이 있다. 자기 고유의 사운드를 가지고 있어 손을 댄 사람은 누구나 그 색으로 물들이는

토드 룬드그렌 같은 타입의 프로듀서도 리스너로서는 즐겁다. 

하지만 나는 특히 밴드에 있어서는 스스로의 소리를 밀어붙이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 자신도 밴드맨으로서, 그래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밴드 사운드를 만들 수 없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커리어를 쌓으며 만난, 사하시 요시유키씨, 오사다 스스무씨, 그리고 존 맥킨타이어라는 삼인삼색의

각각 훌륭한 프로듀서의 방식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내 나름의 스타일을 찾았다. 

 

누구와도 닮지 않은 '후지패브릭'이라는 밴드 고유의 사운드를 만들어내기 위해 6번째의 멤버로서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그들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것이 내 일이고, 거기서부터 앨범을

창조해내야만 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것과 동시에 스스로의 이름이 프로듀서로서 크레딧되는 이상 마음속 깊은 데서부터 좋아할 수 있는 음악을 완성할 책임도 있기에,

그것들이 타협해야 하는 지점에서는 고민했지만, 일단 시작해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시무라군은 자신의 문학적인 가사가 유약하게 받아들여져 자칫하면 '카페BGM'이라고 일컬어지는 소박한 씬으로

분류되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걱정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던 나는 '아무에게도 만만해보이지 않는 강한 작품으로 만들자'고 그와 약속했다. 

 

그러나 멤버는 5명이 모두 모였으나, 그 단계에서는 밴드로서의 사운드는 아직 미지수인 상태였다. 

새로 가입한 소우군, 아다치군, 둘 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테크니컬한 플레이가 가능한 실력 있는 뮤지션이었으나,

그것을 시무라군이 생각하는 록의 미학에 아떻게 녹여낼 것인가를 모색중이었던 것일테다. 

 

그 미학은 정교한 연주를 할 수 있으면 드러나는 종류의 것이 아닌, 도무지 말로는 하기 어려운 감각인데,

시무라군과 나는 그 점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신기하게도 센스를 공유할 수 있었다. 

카나자와군, 카토군도 그에 응답하기 위해 억제된 수수함과 감정이 폭주하는 젊음이라고 하는 상반되는 요소를 두루 갖춘 플레이를

계속해 왔으나 새로 가입한 두사람에게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무라군의 인상은 '어두운 눈을 가진 소년'이었다. 

나카하라 츄야의 유명한 초상 사진을 생각나게 하는, 자주 사진에서 보여주는 그 얼굴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음울한 느낌은 전혀 없고, 오히려 예리하고 순수하면서도 부드럽고 순박한 아우라가

그에게 신뢰감을 부여했다. 그리고 귀엽게 웃는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마 스스로의 기분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썩 잘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미지하는 사운드가 멤버들에게 전해지지 않아 혼자 스튜디오 구석에서 입을 다물어버리고 가만히 있을 때도 있었다. 

 

나는 그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언제나 그 부분에 주의를 기울여야겠다고 결심했다. 

처음 레코딩 중의 대화는 굉장히 심플했다. 

흥이 나지 않을 때의 '그러네요...'와, 상당히 재밌어보일 때의 '그러네요!'의 차이도 구별되어,

가끔 내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을 때 나오는 '좋네요!!!'를 자극 삼아, 그가 추구하는 사운드를 만드려고

멤버들과 함께 시행착오를 겪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Great3 때는 그렇게 간단히 표현가능했던 이상적인 사운드를, 프로듀서로서

혼자서는 좀처럼 만들어낼 수 없는 것에 내심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다. 

시무라군이 추구하는 사운드를 이해할 수 있고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스피커에서

울리게 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커플링곡인 <벚꽃길, 두개의 우산>은 어찌어찌 납득할 수 있게 완성되었으나,

<벚꽃의 계절>은 개인적으로 좀더 잘 할 수 있었을 거라는 후회를 남겨버리고 말게 되었다. 

 

나는 뮤지션으로서가 아니라 프로듀서로서 음악을 다시 파악해야 하는 필연에 쫓겼다. 

그 이래로 일상에서 음악을 듣는 방법도 확 달라져, 순수한 리스너만으로서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일단 추구하는 사운드를 만드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마침 그 즈음, 리믹스다 베스트반이다 해서 Great3의 마스터 테이프와 접할 기회가 많았던 나는,

EMI의 창고에 있었던 멀티마스터를 열어 스스로가 좋아하는 사운드가 어떻게 만들어져있는지를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계속.


「桜の季節」フジファブリッ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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