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oove in the air/Fujifabric - MGZ

원점의 땅, 고엔지를 방문하다 /시무라 마사히코

서울소녀회 2011. 6. 12. 02:14

오랜만에 고엔지에 왔는데요, 여러가지가 생각나네요. 야마나시에서 상경해서 밴드를 하면서 계속 아르바이트를 하고, 관객도 들지 않고. 후지패브릭은 오리지널 멤버는 저 뿐이라 당시는 지금의 멤버가 아니었지만요, 당시의 멤버에게는 제가 '뮤지션이 되고 싶어'라고 말하고 도움을 받았어요. 뮤지션이 아니라, 신사의 신주나 변호사 등을 목표로 하고 있던 사람들이라서요. 그러니까 완전히 제 솔로 프로젝트같은 느낌이었죠. 그래서 '대학도 졸업했으니 탈퇴할게'라는 말을 듣고 혼자가 되었지만요. 고엔지는 도쿄에 있는 원점 중의 원점이에요. 저 요새 택시에 자주 타는데, 2, 3천엔이 든다구요. 고엔지에 살 때는 700엔 정식을 먹을지 500엔 정식을 먹을지, 고작 200엔을 엄청 고민했던 기억이 있어요. 맥주도 안 마셨었고. 그러니까 지금은 좀 호화롭다고 할까, 좀 들떠버렸나 싶네요.

역 로터리에서, 저 혼자서 어쿠스틱 라이브 (弾き語り, 언플러그드로 노래하며 악기를 연주함. 주로 어쿠스틱 기타) 한 적이 한 번 있어요. 도쿄에 와서 일년을 채워갈 때 쯤. 돈도 필요했고, 사람들 앞에서 해봐야겠다고 단순하게 생각해서. 어쿠스틱 라이브라고는 해도 노래를 부르는 건 아니고 블루스같은 걸 기타만 가지고 연주했어요. 리듬을 어쿠스틱 기타로 치다가 이건 혼자서는 더는 무리인 것 같아 20분정도만에 부끄러워졌고, 돈이 들어오기 전에 돌아온 일이 단 한번이지만 있었는데요. 고엔지에서 어쿠스틱 라이브, 또 해보고 싶네요.

고엔지에 살지 않고 로스앤젤레스 클럽이라는 라이브하우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았다면 당시 EMI에 있는 지금의 매니져인 오오모리씨와도 만날수 없었을거고, 메이저 데뷔에의 실마리도 발견하지 못한 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해요. 연습도, 아르바이트도, 음악도, 사람과의 연결고리도 전부 여기였으니까요.

전 항상 선택지를 여러개 준비해요. 고교 즈음이나 중3 즈음에는 뭐가 되고 싶은지 굉장히 고민해봐도 특별한 게 없었어요. 어쩌다 오쿠다 타미오 씨의 라이브를 보고 '이거다!'라고 생각해서 뮤지션이 되겠다고 생각했죠. 그걸 위해 뭘 해야 하나, 선택지를 여러가지 생각하는 중에, 곡을 만들고 기타도 칠 수 있게 되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필연적으로 기타를 사지 않으면 안 됐고. 그렇다면 아르바이트를 해야 된다. 그래서, 그냥 단순히 도쿄에 가는 것만이라면 의미가 없으니까,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오리지널 곡을 만들어두고, 도쿄에 가서는 바로 밴드를 꾸릴 수 있게 해두자고 생각해서 준비를 해 뒀죠. 라이브하우스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것도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면, 누군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에요. 원래 고향에서는 피자 배달을 했었는데요, 여름방학이 되면 도쿄로 나갔던 대학생이 피자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러 돌아왔어요. 그 선배에게 '밴드를 하고 있어요. 멤버를 찾고 싶은데 그런 사람들이 많은 곳은 어디죠?'라고 물었더니 '시모키타나 고엔지 아냐?'란 말을 들어서요. 여러가지 조사해봤는데, 시모키타는 비싸서 무리니까 고엔지로 했어요. 어떤 잡지를 읽었더니 로스앤젤레스 클럽의 아르바이트 모집이 있길래 일단 거기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구요. 그랬더니 제 면접을 본 게 키시단의 기타 토미상이었어요. '좋아하는 음악은 뭡니까?'라는 질문을 받아서, '스톤즈입니다'라고 말했더니 '너 채용'이라고 했어요. 아마 거기서 비주얼계의 이름같은 걸 말했으면 '엉~?'이라고 생각했겠죠. 토미 씨가 점장이 된 후 처음 고용한 아르바이트가 저였어요. 암튼 로스앤젤레스 클럽의 주변에는 키시단의 친구들이 많았어요. 단장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일단 부모님은 3년간의 유예기간을 주셨어요. '3년 안에 계약 같은 걸 따지 못하면 얼른 고향으로 돌아와서 일을 찾아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굉장히 초조했어요. 향수병에 걸린다던가 그런 얘기가 많지만 저는 전혀 걸리지 않았고, 한시라도 빨리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게 있었고요. 그리고 제가 아르바이트로 들어오고 잠시 후부터 키시단이 엄청 잘 나가기 시작했죠. 고엔지의 조그만 라이브하우스가 아니라 시모키타같은 데의 라이브하우스에 나갈 수 있게 되어서요. 거기서부터 O-West 등을 하고, 좀 지났더니 Zepp에 가고 도쿄 돔에 가고. 그렇게 꿈을 이루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이건 나한테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구나 생각했죠.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있으니까 이 다음은 나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했어요. 전 그냥 EMI에 데모 테이프를 보낸건데요, 오오모리씨가 '시무라와 키시단이 친구래'라는 걸 듣고 '그럼 잠깐 보러 갈까'라는 느낌으로 라이브를 보러 왔다고 해요. 그 연결고리가 컸던거죠.

음악을 하고 싶으니까, 음악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으니까 라이브하우스에서 일하는 사람이 많지만, 다들 중도에서 그만둬버리죠. 전 메이저 데뷔라는 형태로 그만둬서, '축복퇴사寿退社'라고 말하는 건데, 그게 가능해서 다행이에요. 로스앤젤레스 클럽의 축복퇴사는 두번째 팀이에요. 첫번째 팀이 키시단, 두번째 팀이 후지패브릭. 18살 4월부터, 2003년의 메이저 데뷔 계약이 결정되기까지 계속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필사적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비는 시간을 봐서 작곡을 하거나 기타를 연습하거나, 지금도 그렇지만 '오늘은 기타도 안 치고 음악도 안 들어'라는 날은 1년 동안 2일 정도밖에 없었어요. 당시는 아침 8시부터 5시까지 나카노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5시 15분부터 밤 12시까지 로스앤젤레스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그걸 각각 주 5일 했고. 그리고 비어있는 밤 2일간은 밴드 연습이었어요. 남아있는, 편의점이 쉬는 낮 2일간은 작곡의 날. 언제나 음악밖에 생각하지 않았죠.

무척 분했던 건, 제가 1980년생인데요, 야구하는 마쓰자카 다이스케松坂大輔씨라던가 히로스에 료코広末涼子씨랑 같은 세대라서, 그들이 인터뷰에서 하루 2, 3시간밖에 자지 않았다고 말하니까. 저는 5, 6시간을 자는구나 싶어서, 그래선 안되겠구나 하고 2시간 3시간 정도로 생활을 했어요.

방금 촬영중에 옛날에 살았던 집 앞을 지나쳐왔는데요, 거기 집 주인 좋은 사람이었어요. 입구에 정원이 있었고 꽃이 이뻤는데요, 방금도 꽃이 조금 보였어요. 그 아주머니 변함없이 지내는구나 싶네요. 저, 집을 빌릴 때, 프리터면 통하지 않으니까 학생이라고 거짓말했었어요. 문화복장학원의 학생이라는 걸로 해서요. 아주머니한테 '오늘 학교에 갔다왔어?'라는 말을 들으면 '네' 이런 식으로. 좀 지나서는 '학교 그만뒀어요. 그만뒀다고 할까, 정말은 가지 않았어요. 음악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이번에 CD가 나와서요'라면서, 인디로 나온 CD를 건네고 이사했어요. '자네는 무척이나 열심히 했잖아. 이제 멀리 가버리지만 힘내' 라고 말해줬어요. 정말로 좋은 아주머니셨어요.

지금은 데모 테이프 만드는 건 전부 스스로 하는데요, 당시에는 집에서 혼자 노래부르고 기타 치면서 만들었어요. 그래서 "노을빛 석양茜色の夕日"같은 곡이 생겼어요. 그거야말로 초기의 충동이죠. 도쿄에 상경해서 바로 만든 곡이니까요. 처음 가사다운 가사가 써졌고. 가사라는 건 어떤 단어여도 괜찮잖아요. 하지만 음악이니까, 곡으로 해서 사람에게 전하는 거니까, 역시 메세지가 없으면 안되는 거죠. 그런 점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곡을 만들 수 있었어요.

인디로서 CD를 내도, 라이브하우스에 관객이 오질 않죠. 그럴 때 고등학교 동급생이 다섯명 정도 와줬었어요. 그게 고마웠어요. 제대로 티켓을 사서 와 줬구요. 그 인디 시절, 관객이 없는 라이브에 계속 와 줬던 친구들이 작년 후지요시다의 라이브를 보러 와서 크게 울었던 모양이에요. 제가, 관객도 없는 라이브하우스에서 누구를 향해 노래부르면 좋을지 모르는 채 하던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런 시골에 천명 이상이나 온 라이브를 보고 시작부터 울어버린 거 같아요. 저도 "노을빛 석양茜色の夕日"에서 울어버렸지만, 제가 우는 건 평생 그 한번만이에요. 해산할 때는 절대로 울지 않을거니까. 웃는 얼굴로 해산할 거니까. 울면서 해산할만큼 부끄러운 건 없다고 생각해요. '할 건 다 했다. 수고했어!' 같은 게 록이라고 생각하니까요. 해산할 때는 안 울거고, 이 다음에 또 꿈을 이룰 수 있는 일같은 게 있다면 괜찮을까 싶고. 다시 생각해보고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열심히 했구나 싶어요. 용케도 포기하지 않았구나 싶고, 그 상황 속에서요. 제가 생각하기에, 관객이 200명에서 2000명이 되는 건 제법 간단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0에서 200명이 되는 게 가장 어렵다구요. 그게 정말로 괴로웠어요. 지금은 라이브를 하면 멤버들에게 조금 돈이 돌아가요. 당시에는 한번에 3, 4만엔을 내고 라이브를 했어요. 제가 티켓을 팔면 그 만큼 상쇄가 되지만, 관객을 부르지 않으면 한번 라이브를 할 때마다 3, 4만엔을 냈으니까 힘들었죠.

사람들에게 '너 운이 좋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되도록 했다'고 생각해요. 확률이 높은 곳에 애써서 가려고 했고, 함부로 막 던지지 않고. 어떤 직업이라도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정말로 꿈을 이루고 싶다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최선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고 지금부터인거죠. 지금부터가 중요해요. 0에서 200은 정말 엄청 힘들고, 200에서 2000은 의외로 간단하고, 2000에서 1만은 정말 엄청 힘들다고 생각하니까요.

오늘, 모든 일에서 초심을 잃지 말라는 걸 통감했어요. 머릿속에 그려온 꿈이랑 실제 지금은 어떤가 하는 것도 그렇구요. 그리고, 지금부터의 꿈을 점점 이루어가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이걸로 끝이 아니니까요.



- 시무라 마사히코 <도쿄, 음악, 록큰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