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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정을 이야기하다 - 록킹온 1만자 인터뷰/ 시무라 마사히코
성장과정을 이야기하다
● 먼저 생년월일을 알려주세요.
1980년 7월 10일입니다.
● 태어난 곳이 어디입니까?
야마나시현의 평범한, 후지요시다시라는 곳에 있는 병원이라고 생각합니다.
● 가족구성은?
그것도 말해요? (웃음)
● 말합니다 (웃음)
누나랑 여동생이에요. 누나는 세살 위고, 여동생이 두살 아래에요.
● 가장 오래된 기억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왜 이렇게 보잘것없는 걸까 초등학교때 생각했었어요. 평범하게 생활하잖아요. 아침밥 먹고 학교에 가서, 학교가 끝나고 야구하고, 돌아와서 저녁밥 먹고 티비 좀 보다가 자는 것 같은 그런 일상적인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는데요. 그러는 중에 언제였지, 잠깐 좀 있어봐봐,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난 나인가?"는 생각을 한 거에요. 어머니가내 안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사람이란 건 틀림없지만요, "아, 별개의 인간이구나"란 생각이 들었어요. 나랑 똑같이 어머니에게도 스스로의 인생스토리가 있는 걸 깨달았던거죠. 거기서부터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책을 바보처럼 잔뜩 읽었어요.
● 어떻게 깨닫게 됐죠?
뭔가 이런, 교정에서 즐거운 듯이 꺄아꺄아거리면서 소란을 피우는 초등학생을 보면서, 뭐 꺄아꺄아거린다고 해도 연상의 선배였지만요. 그걸 보면서 "뭐가 저렇게 재밌는걸까. 응? 내가 아니라서인가"라고 생각했어요. 난 이렇게 즐겁지 않아 보인다고 생각했어요. "아, 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세계는 내 세계하고는 다르구나"라고 생각했을 때, 인간은 한사람 한사람이 다르다는 생각에 빠졌죠. 그때까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타인이라는 존재가 있구나라는, 이른바 자아에 눈을 떴달까요. 그런 적이 있었다는 건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요.
● 아버지는 어떤 분이였습니까?
가게를 했었지만 그만뒀어요. 식료품가게를 해서 채소랑 과일같은 여러가지를 팔았는데요, 그 가게 내음이 견딜 수 없이 좋았어요. 그래서 지금도 슈퍼같은 데 가면, 채소코너나 과일코너나 독특하고 달콤한 냄새가 나잖아요. 그런 게 정말로 좋아요.그 가게가 생각나네요. 어머니도 처음엔 도왔지만 도중에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해서요. 지금은 다른 데에서 일하고 있어요.
● 어떤 가정이었습니까?
글쎄 뭐, 평범한 가정이에요. 가끔 나쁜 짓을 하면 아버지한테 엄하게 혼나기도 하지만. 제가 중학교 즈음에, 학교 안에서 폭죽을 한묶음 터트렸었어요. 학생지도실같은 데, 학생한테 몰수한 담배나 라이터나 불꽃놀이 폭죽이나 알콜 음료가 숨겨져 있는 장소가 있어서요. 그걸 발견하고 "아, 폭죽이다!" 싶었죠. 그래서 거기 있는 라이터를 가지고 "이건 불을 붙일 수 밖에 없다" 고 생각해버렸죠. "할 수 밖에 없다! 주위를 벌벌 떨게 만들어야지" 같은 맘이 있었어요. 그래서 불을 붙였더니, 그 때 학교에서 야마나시현 중학교의 영어 선생님들이 연구회같은 걸 하고 있었는데요, 학교 안에 있다가 전부 몰려나온 선생님들한테 지도를 받은 사건이 있었어요. 이미 대 패닉이었죠. 선배들도 몰려나왔어요. "너 이자식 뭘 한거야!" 같은 느낌으로 학생지도실 주변으로 왔죠. 선생님이 30명 정도 저를 둥글게 에워쌌었어요. 엄청난 일을 저질렀어요.
● 그래서 아버지에게?
그거 한참동안은 들키지 않았었어요. 단지, 학교 선생님한테 어머니가 가서, 그-
● 보호자면담같은 거?
맞아요. 그래서 발각돼서요. 선생님이 "사실은 말이죠" 라고, 일러버린 거에요.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말하고. "뭔 짓을 한거냐!"라는 느낌으로 엄청나게 혼났어요.
● 어머니는 어떤 사람입니까?
뭐, 평범한 사람이에요. 저는 여러가지를 배웠는데요. 야구, 농구, 서예, 주판, 피아노... 를 했어요. 여러가지를 배우게 해주셨죠. 도쿄에서 했다면 아마 상당한 액수였을거에요. 5개를 동시에 했으니까요. 어쩌다 주 7일 중 하루는 2곳에 가야 하는 날이 있었어요. 거기에 초등학교에서 응원부에 들어가서 백팀의 응원가 가사를 내일까지 작사해오라는 말을 들어서요. 아마 가장 높은 학년일 때, 이따금씩 가위바위보에서 져서 응원부가 되고, 가위바위보로 가사를 쓰게 된 그런 흐름이었다고 생각해요. 그 가사 작업도 있었고, 주판도 있고, 가라테도 해야 했기 때문에 전 그렇게 세가지나 되는 건 다 못한다고 울어버렸었어요. 그랬더니 어머니가 주판도 글자연습도 됐으니까 작사에 전념하라고 해줬어요. 우는 건 효과가 있구나 생각했죠.
● (웃음) 어린 시절에 누나랑 여동생과는 사이가 좋았습니까?
글쎄요, 사이가 좋았다고 생각해요. 어른이 되어서는, 뭐라고 할까요, 너무 사이가 좋은 것도 기분 나쁘잖아요. 누나랑 여동생에게 둘러싸여서 엄청 사이가 좋았다면 뭔가 좀, 제 미학에 반해서요. 남자는 좀더 고독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니까 별로 사이가 좋으려고 하지는 앟았어요. 문자에 이모티콘같은 그런 건 전혀 하지 않았고. 겨우 요전번에 문자 주소를 교환해서 여동생의 주소는 알고 있지만 아직껏 다른 주소는 몰라요. 어머니, 아버지도. 나이도 모르구요. 저한테 나이를 가르쳐 주질 않아요. 옛날에, "학원 신청란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연령을 쓰고 싶은데, 몇살이야?" 라고 물었더니 "안 가르쳐줘"라면서 가르쳐 주질 않아서
● 어린 시절에 자매들과는 자주 놀았습니까?
동생하고 사이가 좋았어요. 역시 누나보다는 나이가 한 살 더 가까워서요. 누나는 제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고등학교에 갔으니까 같이 다니질 않았어요. 하지만 동생은 제가 중3일 때는 중1이라 조금 같이 다녔으니까, 행사나 뭐가 있는지도 알아서요, 비교적 초등학교 때는 사이가 좋았어요. 자주 같이 놀고 다치고 그랬어요. 골절같은 걸 당했어요. 아마 어딘가 받침대에서 뛰어내렸다고 생각하는데요.
● 초등학교 때 놀면서 뭘 자주 했습니까?
미니카가 유행해서요. 보통 최고의 머신을 만드는 게 물론 근사하지만요. 바디 경량화를 꾀하고, 정밀도가 높은 모터를 사서, 그런 머신을 만드는 것도 좋지만요, 저는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어서 최고의 슈퍼머신을 만든 담에, 그걸 엉망진창으로 부쉈어요.
● 하하하하.
주머니칼을 가지고- 완전히 칼이었어요. 집에 숨겨둔 칼을 가지고, 싹둑싹둑해서. 타이어나 바디같은 게 너덜너덜해져도, 필사적인 상태에서 움직이는 상황이 멋지다! 거기에 도취됐어요. 저 엄지 손가락에 상처가 있는데요. 손가락이 완전히 두동강이 났었어요. 그걸 미니카 사건이라고 해요. 미니카를 싹둑싹둑 오른손으로 잘랐더니, 왼손의 엄지손가락을 관통해버려서. "엄지손가락과 미니카를 잘랐어!" 같은 느낌으로. 그런, 덧없다고 할까 슈퍼 머신이 망가져 가는 모습이 멋지다는 미학이 예전부터-지금도 변함없지만, 가지고 있었어요.
● (웃음) 신기한 놀이를 했네요.
그렇네요. 뭐 그래도 그런 걸 계속 하면서 평범하게 야구를 많이 좋아했으니까요. 하라 타츠노리原辰徳세대라서요. 에이트 맨(eight man) 세대. 아버지한테 영향을 받아서 쿄진의 시합은 계속 봤어요.
● 가정은 화기애애했나요?
그냥 평범한데요, 밥을 먹을 때는 완전히 전원 정좌고 아버지만 양반다리를 해도 괜찮았어요. 티비도 절대로 보면 안됐고. 아, 그러고 보니 락교 폭파사건이라는 게 있었어요. 아버지만 양반다리를 하고, 저랑 누나랑 동생과 어머니는 정좌하고 밥을 먹었는데요. 교자상같은 데에 락교가 병에 담겨 있었어요. 그랬더니, 거품이 났나 어쨌나 락교가 쾅하고 폭발한 거에요. 그래서 유리가 흩날렸어요. 다들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폭발했어!" 같은 소릴 했죠. 락교의 식초의 맛인지 제 피맛인지 모를 정도. "뭐야 이거, 락교가 날았어!" 라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 (웃음) 유치원은?
어린이집이 집 옆에 있어서 거길 다녔어요. 그리고 또 스테이크 사건이 있었는데요. 급식으로 스테이크가 나왔었어요. 그 때 굉장히 거대한 고기가 나왔어요. 게다가 지방부분도 진짜 많은 거였어요. 지금도 그렇지만요, 태어날때부터 지방 부분은 엄청 싫어해서요. 씹어도 끊어지지 않는 그 나쁜 느낌이 너무 싫어서 남겼었어요. 그랬더니 엄격한 어린이집 선생님이 전부 다 먹을 때까지 집에 보내주질 않았어요. 밤 7시 정도였나요. 유치원생이나 어린이집 학생한테는 이미 새벽이라구요. 다 먹을 때까지 선생님이 계속 보고 있었어요. 벌써 어머니는 데리러 왔고, "못 먹겠어"하고 울면서요. "안 먹어!" "먹어!" "안 먹어!" " 먹으라고!" "안 먹어!" 그랬죠.
● 하하하.
잘 모르는 거 같네. "못 먹겠어!" "먹어!" "못 먹어!" "먹어!" 그런 거였어요 (웃음)
● 어린이집에서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그다지 기억은 안나요. 단지 조금 신경 쓰이는 애가 다른 남자애랑 뽀뽀했던 거 같은 건 기억하는데요.
● 그게 첫사랑입니까?
딱히 사랑도 아니에요. 단순히 신경이 쓰였던 애에요. 첫사랑은 제가 고3일 때니까요.
● 그건 나중에 물을거니까요.
그것도 묻는구나 (웃음) "여자아이"라는 존재를 인식한 건 그 애가 처음이었어요.
● 장래희망은 그 때부터였던 건가요?
당연히 프로 야구 선수였었죠. 그건 줄곧 중3일 때까지 계속됐어요. 중3때 야구부가 끝날때까지, 장래희망은 프로야구선수.
● 그래서,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는 잘 했습니까?
항상 톱. 옛날에 뭔가 감상문에서 저희 집 풍경같은 걸 글로 썼었어요. 거기에, "우리 집에서는 초등학교 테스트가 90점 이하이면 무척 혼납니다. 그래서 늘 공부를 해야 합니다." 같은 걸 썼었어요. 그리고 보호자 모임을 할 때에 그걸 발표해버렸으니까요, 저희 어머니는 굉장히 거기 있기 불편했었을 거에요. 누나가 학생회장을 했었어요. 초등학교랑 중학교. 그 흐름을 이어받아서 저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됐달까. 스포츠 이외에 학원에도 갔었어요. 진학학원(보습학원)을 두개.
● 스포츠는 잘 했습니까?
스포츠도 보통정도로 했죠. (철봉) 거꾸로 오르기가 안 되는 사람도 많다고 생각하는데요, 전 됐었어요. 그리고 쉬는 시간에는 축구를 하거나, 농구를 하거나.
● 초등학교에서 스포츠도 공부도 잘하면 인기가 많잖아요.
이제껏 지금까지 인기 있었던 적이 없어요. 아, 초등학교 때는 인기가 있었는지도! 발렌타인 데이는 저희 가게 앞에 여자애들이 줄지어 있었다구요. 전 그걸 방에서 보고, "여자애들 무서워~"라고 생각하면서 밖엘 나오질 못했어요. 그래도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요.
● 어, 안 받았었어요?
여자애는 무서웠어요. 초등학교나 중학교도 그랬지만 여성이 가진 권력이 굉장히 강하다는 이미지가 있어서요. 고등학생정도부터는 겨우 동등한 정도가 됐다고 생각했지만요. 초등학교같을 땐 정말로 여성이 무서웠어요. 그런 센 애들한테 초콜렛같은 걸 받는 날에는 이상한 소문이 생기면 무섭다고 생각해서 안 받았어요. 그러니까 좋아했던 애도 없었죠. 단순히 무서움의 상징이었고. 무서운 생물 중 하나였고. 뭐 지금도 그렇죠. 말해버리자면 초등학생 때랑 별로 달라지지 않았어요.
● 초등학생 시절에 친구가 꽤 있었습니까?
지금보다 있었어요. 전교생이 친구.
● (웃음) 그럼 인기인이었네요. 공부도 스포츠도 잘하고, 누나는 전교회장이었고.
그렇죠. 학교에서 무슨 대회가 있는 날에는 1위를 했고. 오리엔테이션... 뭔가 학교 축제같은 거에서, 여러가지 행사가 있었어요. 거기서 1위를 했죠. 초등학교에 그 대회의 그룹 파벌이 있었어요. 전 옛날부터 이름짓기만큼은 공들 들여서요. 그 때 그룹이름이 생 피에르 베라마챠* 오챠마챠 마츠타케쿡파* 코테챵*이라고 해요.
*크리스마스 캐롤 중 하나의 후렴을 잘못 들은 말.
*송이버섯 국밥.
*에스후즈エスフーズ주식회사가 발표한 야끼니꾸식품의 상표. 이름의 유래는 한국어에서 소의 대장부위를 가리키는 '대장'에 '코こ'를 붙인 것.
● (웃음)
이렇게 잘 모른다니깐요. 지금으로 치면 긴 밴드 이름이 유행하잖아요. 그러니까 길면 좋은 거에요. 생 피에르 베라마챠 오챠마챠 마츠다케쿡파 코테챵이라는 그룹 이름으로 활동했었어요. 전교생 앞에서 선생님한테 대회 대상을 건네받았는데요. 이름이 너무 기니까, "생 피에르 베라맛챠 오챠마챠 마츠다케쿡파 코테챵 귀하"같은 걸 말할 수가 없으니까, "음- 뭔 팀에게" 같이 됐죠 (웃음)
● (웃음) 그 때, 좋아했던 티비 프로그램같은 게 있었습니까?
당연히 웃짱난짱*이었죠. "앗, 쿵!え、ドスン!" 같은 거 했었죠
*일본의 오와라이 콤비.
● (웃음) "할 거면 해야 돼!"* 였었죠?
맞아요 맞아요. 만푸쿠 타로 満腹太郎 (부른 배 타로) 였었나. 아, 만푸쿠 후토루 満腹太 (부른 배 살 찐다) 인가. 말고도, "앗, 쿵!" 이라는 캐릭터가 있어서, 그 얼굴 흉내같은 걸 냈었어요.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만푸쿠 후토루라는 이름 대단하네(웃음)
*やるならやらねば! 웃짱난짱이 했던 개그 프로그램 이름.
● (웃음) 그, 초등학교에서 타인의 존재를 인식해서 갑자기 인격이 변한 게 있었습니까?
어두워졌죠. "소피의 세계"라던가, 가벼운 철학서가 있잖아요. 그런 걸 읽거나 했었어요. 저 1학년에 책을 많이 읽었다고 생각해요. 하루에 2, 3권은 읽었으니까요. 속독이라고 하나요? 빨리 읽는 게 가능했었어요. 이미 학교에 있는 책은 전부 다 읽었죠. 도감부터 시작해서 보통 소설이었나. 거기서부터 성격이 어두워져서, 내가 있을 곳을 모르게 돼서 말예요. 그리고 중학교에 들어갔어요.
● 그 때 학원은 계속 다니고 있었습니까?
가라테를 하고 있었어요. 검은띠에요. 하지만 중학교에 가서 야구부가 바빠졌기 때문에 습자정도밖에 할 수 없게 되었는데요. 다른 건 벌써 학년에서 톱클래스까지 갔었죠. 농구는 항상 주전이었고. 습자는 좀 아쉬웠는데. 가장 위에가 특대생이라는 거에요. 그리고 전 준특대생이었어요. 초단, 2단, 3단, 4단, 5단이 있고 그 위에 준특대생이란 게 있고. 준특대생이 된 시점에서 이미 타임아웃이라는 느낌이어서요. 음악을 좀 해야겠다는 기분이라 그만뒀어요.
● 중학교에서도 인기가 있었어요?
중학교에서도 또, 난 인기가 없나보다 생각했더니 졸업날에 엄청난 수의 사람한테 고백받아서요. 후배한테 "사진 찍어주세요!"라던가, "사귀어주세요!"같은 걸 엄청 들었어요. "뭐야, 졸업할 때 다 돼서 말하지 마!"라고 생각했어요.
● 그래도 역시 자기가 좋아했던 사람이 없었습니까?
(그런 사람은) 딱히 없었지만요, 사귀어버렸었어요. 그런 일 자주 있잖아요. 좋은지 모르겠지만 일단 사귀어볼까 같은 거. 하지만, 정말로 미안하지만, 사귀었던 결과 '역시 별로 좋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으니까 헤어지려고 생각합니다'라는 게 가끔 있어서, 3명정도 있었어요. 대개 1개월정도였어요. 중학생 정도 쯤에는 이성이 무섭다던가, 특별한 상징이라는 생각은 있었지만요, 연인이 된다는 감각이 상상이 안 돼서요. 그래서 고백받았으니까 일단 사귀어볼까는 생각으로 사귀어 보긴 했는데, 좋아한다는 걸 잘 모르겠다고 생각해서, 결과적으로 헤어졌죠.
● 야구부는 어땠습니까?
진짜 정말로 스펙터클했어요. 여기서부터 좌절이 시작되는데요. 등번호가 상위 1부터 가면 부원이 50명정도 되는데 가운데 30번정도가 된거에요. 그때까지 항상 톱이었는데. 할 마음이 확 없어졌죠. 별로 연습도 안 했고. 그래서 딱히 주전이 안 되는 건 당연하잖아 싶어서요. 그다지 할 맘이 없었다고 생각해요. 중학교 즈음, 시라이 군이라는, 좌타자의 되게 좋은 폼을 가진 친구가 있었어요. 그 애를 봤을 때, "아아, 여기엔 못 당하겠다"라고 순간적으로 생각한 거에요. 그 애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굉장한데요. 타율도 8할이었고. 4할을 칠 수 있으면 이치로니까요. 이 녀석은 프로 야구선수가 될거다 싶은 재능이 있어서, "이젠 됐어"라는 기분이 됐어요. 1학년 2학년은 사실 청소같은 거, 거의 그런 거 밖에 할 수 없으니까 중3 때 겨우 야구를 할 수 있었는데요, 그 때는 시라이 군한테 발끝도 못 따라갔어요. 걔는 분명히 1, 2학년 때부터 집에서 근육 트레이닝같은 거 했을 거에요. 그런 일이 있었어요. 고등학교에 갈 때 야구부를 할까, 하지만 시라이 군이라는 대단한 타자도 있고, 그런 애도 고교에서 활약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고, 나같은 녀석이 간대도 어차피 무리라는 느낌으로 입부 신청서를 안 냈었죠.
● 중학생 때는 음악에 그렇게 흥미가 없었던 건가요?
없었어요. 유행하는 티비의 차트 프로그램이나 보고 그런 걸 듣는 정도라서 제가 찾아서 듣는 건 없었어요.
● 그리하여 야구를 그만두고.
그만뒀어요. 그리고 고교 1학년 2학년에는 여러가지 책을 읽었어요. 책 가장 뒤에 빌린 사람 이름이 쓰여 있는 도서 카드란 게 옛날에 있어서요. 아마 거의 제 이름이 쓰여 있을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도서위원이었거든요. 책도 읽을 수 있고. 공부도 여전히 대충 중간에 있었달까. 제가 고등학교 때 평범한 성적이는데 열심히 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 싶어서 한번은 시험에서 엄청 열심히 했었어요. 그랬더니 300, 400명 중에 학년 1위같은 게 되어버려서요. 고1인가 고2 정도에. "아, 나 공부 하면 되는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전 별로, 중3 때 타미오 씨랑 만나버렸으니까 음악을 할 거고,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갈 맘은 없으니까 이제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굳이 낙제하지는 않는 정도로, 대충 중간에 있어야지 생각해서요. 그래서 100위 정도를 계속 유지했었어요.
● 그 중3때 있었던 타미오 씨와의 만남을 새삼 듣고 싶은데요. 고향의 후지큐 하이랜드에서 한 라이브를 보러 갔었죠.
네, 타미오 씨가 라이브에 왔었는데요. 지금 사무소인 SMA 축제같은 느낌으로, 스파고-라던가 SMA의 아티스트가 많이 나왔었어요. 제가 학교 과제로 친구랑 산에 화석을 채집하러 갔었거든요. 후지요시다 부근은 후지산이 있으니까 조개 껍데기같은 게 있어요. 옛날에는 수평선에 있었으니까. 그런 화석 채집을 하러 갔을 때, "마사히코, 이번주 주말에 오쿠다 타미오라는 사람이 하는 라이브 티켓이 있는데 갈래?" 란 말을 들었어요. "아, 갈래"라고 했죠. 그래서 가기 전에 예습을 하잖아요. "음, 오쿠다 타미오는 누구지"란 거요. 어떤 음악을 하는 걸까 궁금해졌을 때 들었더니 빠져버려서. 솔로활동을 시작하고 금방 낸 "29"라는 앨범이 나왔을 때에요. "뭐야 이 스님같은 목소리는?"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뇨, 이건 좋은 의미로 (웃음) 평범한 음악이라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콘서트장이란 거 블록이 나누어져 있잖아요. 전 가장 뒤였던 게 마음에 안 들어서, "뭐야, 젠장!" 하고 가장 앞에 가서, 관계자한테 꼼짝못하게 붙들려서는 가장 옆으로 밀렸어요. 그래서 다시 한번 한가운데로 가서, 한번 더 앞에 갔죠. "한번 더 타미오 가까이에 갈거야!" 같은 거죠. 타미오 씨의 그 맥빠지는 토크랑 패션이랑 음악이란 건, 굉장히 참신한 게 있었어요. 우리들의 청춘에 틈입해 들어오는 게 있었어요. 혁명적인 게. 제가 중학교 3학년인가 그 쯤에는 불황의 입구였다고 생각해요. 경기가 나빠지고 있는 중에 뭔가 사기를 북돋워주자는 음악이나, 여러가지 시장이 있었다고 생각하는데요. 불황에 빠지지 않게 힘내자는 세상 속에서 타미오 씨는 "난 그런 거 모른다" 라는 느낌의 록을 하고 있어서 "이 사람 멋지다!"라고 생각했던 거에요. 세계에 지지 않는, 그런 불황에 오히려 지지 않는. 록뮤지션이라고 하면 되게 번쩍번쩍한 셔츠를 입고 화려한 복장을 한 이미지였는데, 청바지에 티셔츠여서 "그런 걸로 괜찮나?" 생각하고. "나도 해야지!"라고, (타미오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사랑을 위해"의 인트로에서 ♪쟈쟈쟈~하는 그 기타로 시작할 때, 우오-!!! 하고 불타올라서 앞으로 나갔어요. 그래서 끝나고 뜨겁게 이야기했어요. "난 반드시 뮤지션이 되기로 결정했다, 이제 야구부같은 건 얘기하지 않을거야!" 같은 걸. 그래서 그 라이브 후에 "으-음, 뮤지션이 되고 싶어. 어떡하지?"라고 말하는 사이에 고교생이 되어버렸다는 느낌이에요. 되어버렸달까, 저는 왜인지, 야마나시 현에서 1위 2위를 다툴 정도의 진학교에 가버렸거든요. 이게 또 들어가버렸다는 게 좀 비아냥같은 이야기인데요. 그래서 시험공부를 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변함없이 오쿠다 타미오의 열기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 타미오 씨에게 빠진 다음부터, 여러가지 다른 음악을 듣기 시작한 건가요?
맞아요. 타미오 씨가 잡지같은 데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favorite artist로 여러가지를 꼽았었는데 그런 걸 많이 들었어요. 예를 들면 레드 제플린을 듣고, 이것저것 읽었더니 70년대 록에는 여러 밴드가 있었고, 킹 크림슨이며 크림이며 그런 오래되고 좋은 음악들이요. 그런 데서 점점 (지식을) 배워갔죠.
● 음악친구같은 건 있었습니까?
있었어요. 가장 초기 후지패브릭 멤버가 그 면면들이에요. 고1때 동급생이랑 결성해서 도쿄에 나올 때까지 했었어요. 그 때 한명 고리폰ゴリポン*이란 애가 있었어요. 기타였어요. 속주밖에 안 되는 기타리스트가 있었어요. (웃음) 그 녀석이 그만뒀고, 그래서 4명이서 도쿄에 나왔었어요.
* 원숭이를 의인화한 만화캐릭터.
●곡은 계속 시무라씨가 만들었지요.
저밖에 만드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다들 카피는 하지만, 오리지날 지향은 아니었달까, 프로지향은 아니었어서요. 그래서 프로지향인 저만 작곡할 수밖에 없었어요. 카피는 맨처음 타미오씨부터 시작해서 레드 제플린으로 가기. 고교를 졸업할 쯤에는 재즈나 브라질 음악을 듣게 되었어요. 아, 학원제에서 오리지날 곡을 했었어요. 그랬더니 그게 고향 지방의 티비 방송국의 학원제 테마송같은 게 돼버렸어요. 마침 녹화하는 방송팀이 있어서, 멋대로 방송해버려서요. 어지럽게 잔뜩 기교만 부리는데. "내 목소리를 내보내는 건 그만둬! 아직 일러!" 같은 느낌. "앞으로 2년 후 남았으니까 기다려!" 같은 느낌. 다른 걸로는 "도마뱀"이나, "상어"라던가 이런저런 게 있었어요. "칠판"이라던가.
●밴드는 비교적 열심히 연습했었습니까?
저만 연습했었어요. 다른 애들은 전부 "철권2"만 줄창 했어요.
●하하하.
"연습해!" 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들 플레이스테이션만 하고 있었으니까요. 저만 집에서 녹음을 했어요. 저 드럼을 지금도 치고 있는데요, 칠 수 있는 원인이 당시 드러머가 드럼을 치지 않은 일이 있어서에요. 데모 테이프를 만들고 싶은데 드럼을 쳐 주질 않으니까 제가 칠 수밖에요. 장소는, 친구 집에 드럼이 있었고. 제가 드럼을 쳤어요. 마이크같은 것도 세팅하고 소리를 녹음해서 홈레코딩을 했습니다.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아요, 하는 게.
●주위 평판은 어땠습니까? 학원제나 라이브에서 하면.
평판이, 좋았죠. 그래서 또 들떠버려서는. 학원제에서 라이브를 고2 정도에 했었는데요. 라이브 하기 전은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라이브가 끝난 후에 완전 꺄-! 같은 게, "사진 찍어줘!" 같은 느낌이 되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지금도 공연장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데요, 그걸 가볍게 넘는 수의 사람이 제가 나오길 기다리곤 했어요.
● 이러쿵저러쿵해도 역시 초등학교때부터 계속 인기가 많잖아요.
그러네요. 스스로는 깨닫지 못했었고, 사귄 사람도 거의 없지만요. 뭐 그래도 단순히 일반적으로 꺄꺄 소리를 들은 것 뿐이니까. 그런 분들은 실제로 사귀고 싶다던가는 생각하지 않잖을까요.
●가족에게 뮤지션이 되고 싶다고 말하곤 했습니까?
음.. "뮤지션 멋있어어" 같은 얘기는 했을지 모르지만, 막상 뮤지션이 되고 싶다고 말한 건 고3때에요.
● 아버지가 옛날에 ventures 카피밴드를 하고, 뮤지션을 목표로 했다고 하는데요.
맞아요. 제가 그 고3정도 됐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요, 그 할머니가 말씀하시길- 제가 도쿄에 음악을 하러 간다는 걸 할머니는 대충 알고 있었어요. 제가 고등학생 쯤부터 음악을 하러 도쿄에 가겠다고 별 생각없이 말했었으니까. 그래서, "마사히코네 아빠는 음악을 하러 도쿄에 갔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고향에 돌아와서 자기 일을 하고 있어. 그래도 음악을 한다면 힘내렴"이란 식으로 말해줬었어요. 하지만, 가족들한테 뮤지션이 되고 싶다고 말해도, "된다고 해도, 결국 못 될거잖아. 뮤지션이 될 수 있는 사람따윈 정말로 한줌밖에 안되는 사람들 뿐이야"라고 말하는 게 끝이려니 생각했으니까요. 그렇담 이미 결정했으니까, 몇개정도 요점을 늘어놓고 돌파할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우선은 고교 3년간 상경할 돈을 저축했어요. 보증금·예금, 돈을 저축해서 스스로 어떻게든 해내겠다. 그리고 음악가가 되고싶다고 말만 해서는 될 수 없다. 먼저 곡을 만들 수 없으면 안돼. 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래서 작곡 공부를 하려고 피아노 선생님에게 배우기 시작했어요. 자비로. 도쿄에 갔을 때에는 이런 걸 해야지 같은 요점을 몇개 부모님께 미리 제시해서 장래 뮤지션이 될 수 있는 퍼센티지를 많이 올렸죠.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가능할 수도"라고 생각하게끔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곡도, 만든 데모테이프도, 부끄럽지만 부모님에게 들려드렸어요. 카세트테이프로. "그런 곡을 만들었으니까. 뮤지션이 될 수 있겠죠?" 같은 거죠. "가만히 내 말을 듣고, 도쿄에보내주면 된다고"같은 느낌으로. "그렇다면 알겠다"랬어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해봐라. 그 대신 유예를 3년만 줄거야. 3년 안에 계약이든 뭐든 못 따내면 고향으로 돌아와"라는 말을 들었어요. 계약이랄까, 계약조짐같은 거여도 확실하게 있으면 괜찮지만, 없으면 바로 집으로 돌아와서 일을 해라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럼 아르바이트는 많이 했습니까?
했죠. 경쟁하는 피자가게가 2점포 있었는데요, 두 군데서 전부 일했어요. 배달을 했어요. 그리고 맥도날드같은 데서 일했었네요. 고1땐가는 시급 700엔 800엔 정도로 했지만, 고3정도 되니까 그렇게 낮은 시급으로는 할 수가 없겠어서, 면허를 땄어요. 원동기 면허가 있으면 1000엔이라서요. 배달을 했죠.
● 들키지 않게 피자를 한조각 먹기도 했다고 말했었죠.
피자사건. L사이즈는 12등분이거든요. 갓 만든 거면 치즈가 부드러우니까 1장 정도 빼도 붙이면 붙거든요. 그러니까 들키지 않겠다 싶어서 먹어버렸던 사건. 3번 정도 했어요. 그게, 정말 배가 고팠단 말이에요. "잘려도 어쩔 수 없다. 배가 고픈걸" 이라고 생각했어요. 학교가 4시에 끝나고 4시반부터 한밤중 12시까지였어요, 아르바이트가. 배가 고픈 것도 당연하잖아요. "진짜 배고파!", 먹어버렸어요.
● 그럼 아르바이트로 바쁘게 지내서 동아리 활동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까?
완전 귀가부.
● 공부도, 뭐 하면 되는 거고.
공부는 벌써 좀 하면 되는 걸 알았으니까요. 공식만 외워두면 뭐든간에 어떻게든 되잖아요. 그리고 수업중에 공부하면 딱히 집에 돌아가서 공부할 필요가 없거든요. 학교에서 진지하게 칠판을 보고 제대로 필기를 하고, 제대로 암기하려고 해서 하면, 사실은 공부같은 건 안 해도 돼요. 전 이미 평상시부터 어제의 공부 내용이 뭐였지?라고, 습관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떠올려봤어요. 그래서 시험전에 굳이 공부하지 않아도 됐던거죠. "아아, 그 공식이구나"같은. 그러니까 수업 중에는, 왼손으로는 워크맨을 켜서 그 쪽에서 흐르는 음악을 들으면서, 선생님의 말을 듣고 공부하면서, 오른편으로 암기 공식을 쓰는 것 같은.
● (웃음) 대단하네요.
엄청 쇼토쿠태자같죠. 3가지 기술을.
● 음악의 길로 나간다는 목표를 발견하고 나서는 교실에서도 레코더를 돌려서 여러가지를 녹음하곤 했다고 말했었죠.
네. 수업시간도 쉬는시간도 MD 덱에 녹음했었어요. 지금도 가지고 있구요. 아, 오늘 가지고 왔는데. (가방에서 꺼낸다) 마침 오늘 노래 연습하고 와서요.
● 그거 당시에 썼던 건가요?
썼던 거에요. 낡고 닳아서, 소니 로고가 다 벗겨져서 안 보여요.
● 그야 10년 이상 된 거잖아요.
맞아요. 이게 가장 소리가 좋아서요. 지금은 이미 IC 레코더를 쓰게 됐지만요. 그리고, 고등학교 당시에는, 뭐든지간에 굉장히 찰나적이었거든요. 곡을 써내는 일만이 음악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쉬는 시간에 소리를 녹음해둬서 10년 후에 다시 들어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하는 걸, 벌써 생각했었거든요.
● 그건 뭘 위해서입니까?
살아가고 있는 이상 분명히 그 시절은 좋았다던가, 그런 식으로 생각이 날 장면이 꽤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럴 때 원점회귀랄까, 그런 것들의 재료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 작곡방법에 관해서, 고교시절 동안 점점 이렇게 되어갔다는 게 있습니까?
작곡은 변함없고, 음악이론같은 이야기라면 지금도 물론 공부중이고, 아직 더듬어가는 중인데요, 녹음기재같은 건 점점 충실해졌어요. 처음에는 카세트 테이프 4트랙 레코더였었는데 고등학교 3학년정도 되고나서 8트랙 MD 레코더가 되는 식이었죠. 그런 사운드 면에서의 진보가 있었군요. 그게 지금은 프로 툴이나, 뭐 음악제작 소프트로 하는 로직이나, 안 그래도 바로 어제 버젼을 로직 7에서 로직 8로 옮기는 그런 작업을 했는데요. 그러니까 하는 일이 당시랑 그렇게 많이 변하지 않았네요. 계속 (목표를) 추구하고 쫓아가고 있어요.
● 그렇군요. 그럼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오직 음악뿐이라는 느낌이었던 건가요?
맞아요. 음악뿐이라고 해도 여러가지 다른 게 있었지만요. 공부도 쬐금씩 했었는데요. 뭐 진심 브라더스의 곡에도 그런 말이 있지만, 내 손에 닿지 않는 유일한 것, 역시 여자아이죠. 고등학교 1, 2학년은 전혀 없었어요. 하지만 고3무렵 어엿이 첫사랑이란 걸 했어요. 신기하죠, 사랑이란 건. 이렇게, 붙잡으러 가게끔 한달까. 같은 학교 같은 반의 아이였어요.
● 그 사람은 뭐가 달랐습니까?
입술. 입술이라고 해도, 겉으로 보이는 거 말이에요. 딱 "입술의 그것" 이라는 곡이 있지만요, 그 상징이 될 듯한 인물이 거기에 있었어요. 멋대로 망상해버렸었죠. 그 아이만 특별했어요. 처음은 동급생이 그 애를 좋아해서, 좋아한다는 걸 전해달라는 말을 들었어요. "왜 내가 전해줘야 되는거지" 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있잖아, 쟤가 널 좋아한대"라고 말하러 갔거든요. 그랬더니 뭔가 잘 모르겠지만 저도 좋아져버려서. 아, 이 애 좋다, 라고, 처음으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이가 좋아지고 사귀었었죠. 서로 이야기하는 사이에 어느 순간인가 사귀고 있는 것처럼 되는 상태가 있잖아요.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학교가 4시에 끝나고, 4시반 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서 밤 12시에 끝나는데요, 12시부터 아침 4시 5시까지 그 애랑 만났어요. 그래, 2시간만 자고 7시에 일어나서 학교에 가서 수업은 워크맨으로 타미오씨의 음악을 들으면서 학업에 힘쓰고, 또 아르바이트에 가서 밤중에는 그 여자아이랑 만나는 식. 이미 연예인 급으로 바빴죠 (웃음). 그 애는 밤중에 집에서 빠져나오려고 2층 창문에서 뛰어내렸대니까요. 1층으로 가면 부모님한테 발견되니까 2층에서 뛰어내렸어요. 그런 아련한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 그건 오랫동안 계속됐나요?
그건 대강 1개월 정도였군요.
● 하하하하.
(웃음) 역시 무서웠던거죠. 그리고나서, 1개월만에 차였다는 게 아주 커서요. 지금까지는 내가 찼는데 차였다는 게 굉장히 충격이라서요. 거기서 스토커 사건이 발행합니다. 상경하기 직전 쯤에 차였는데요, 그 애도 상경했고, 저는 아직 그 애가 좋은 채로 상경해서 집 주소를 사실 알고 있었어요.그 애는 이타바시 구에 있는 슈쿠토쿠淑徳(대학)에 갔어요. 전문대니까 2년 후에 돌아가지만요. 2년 간 계속 스토킹을 했어요. 그 이타바시구에 있는 집에 가보고, 그 애가 있으려나, 없으려나.
● 얼마나 빈번하게 갔었습니까?
한달에 한번. 하지만 한번도 못 만났다구요. 그 애가 없어진 후에도, 전 그 맨션에는 자주 갔었어요. 추억으로. 지금도 가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 가면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달까.
바로 그거에요.
● 뭔가 긍정적인 스토커네요 (웃음)
진짜 긍정적이에요. 쓰레기 같은 건 절대로 버리지 않고. 상대에게 전혀 해는 입히지 않아요. 단지 보는 것만으로 좋다는 거죠. 벌써 제 안에서 완결이 났다는 거죠.
● 헤어질 때 무슨 말을 들었습니까?
이유도 말하지 않고, 헤어지고 싶다는 말을 들었어요. 이쪽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일단 저도 남자고, 알겠다고 했죠. 뭐 좌절이죠, 확실하게. 그런 생각을 계속 이어온 채 상경해서 "노을빛 석양"이라는 곡을 만들었던 거에요.
● 그래서, 상경해보니 도쿄에는 프로를 목표로 하고 있는 이런저런 사람들이 있었을텐데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해서 대단한 밴드랑 만났어요. 지금은 해산해버렸지만, 아르바이트처인 고엔지의 로스앤젤레스 클럽에 있는 오리존이라는 밴드가 있어서요. 그 밴드에게 무척 영향을 받았어요. 그 보컬에게 여러가지를 배웠어요. 자미로콰이라던가. 그런 댄스 뮤직씬같은 건 잘 몰랐으니까요. 재즈같은 건 알고 있었지만요. 클럽 뮤직- 뭐 팝이죠. 여러가지를 배웠어요.
● 고엔지에 사는 게 시무라씨로서는 뮤지션이 되는 제일의 지름길이었던 거네요.
그렇지요. 우선 음악을 하기 전에, 역시 확률이라고 생각해서요. 막상 음악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에, 하치오우시같은 데 살게 되면 의미가 별로 없을거라고 생각했어요. 야마나시랑도 가깝고. 그렇다면 음악가가 모이는 고엔지나 시모키타나, 그런 곳에 있는 편이 프로 지향 밴드의 멤버가 되어 주는 사람과 만날 확률이 높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라이브하우스에서 아르바이트했던 것도 그걸 노린거에요. 그런 만남이 있지 않을까 하고. 그래서, 로스앤젤레스클럽에서 키시단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그게 계기가 되어서 지금의 매니져가 후지패브릭의 라이브를 보러 와줬고, 메이저 데뷔로 이어진건데요. 그러니까 하치오우시같은 데서 아르바이트를 했다면, 완전히 달랐을 거에요. 반대로 혹시 제가 예컨대 시모키타의 Que같은 데서 아르바이트를 했다면, 좀 더 달랐을지도 모르고.
● 후지패브릭의 음악은, 초기에는 특히 달라붙는 질감(점착력)의, 끈적끈적한 느낌이 있었어요. 가사는 상당히 자문자답하면서 몸부림치고 있었는데요. 그건 스스로의 어떤 면이 드러난 거라고 생각합니까?
역시 반골정신의 혼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당시에 유행하는 밴드를 흉내내봤자 전혀 멋있지 않고, 뭔가 저의 록을 해야 한다는 게 있었어요. 거기에, 브라질 음악에서 흡수한 게 일본풍으로 소화되어서 그런 음악이 됐다고 생각해요. 라이브하우스에서도 다들 똑같은 기자재를 사용해서 똑같은 곡을 만들어서 똑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고. 그런 중에 저희들은 ♪쫓아가 쫓아가라~ 같은, 일그러지고 잘 알 수 없는 음악을 줄곧 했어요. 역시 저의 그 스토커 사건때부터 끈적해졌죠. 음악이란건, 연주를 하면 물론 음악이 되지만, 역시 메세지잖아요. 그런 면에 있어서 전 진짜로 메세지 자체가 끈적했었으니까요. 그게 마침 음악으로 드러났을 뿐이에요. 제가 그 애랑 순수하게 계속 사귀어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면, 아마 마음이 안정되어서 더는 음악을 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그게 계기인데요, 음악을 계속 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그 아이를 다시 만나서 하고 싶은 게 있다는 것도 분명히 있었으니까요. "더는 구원받을 수 없지만, 어떻게든 해줘"같은 곡밖에 없었잖아요, 후지패브릭은. 그런 게 됐던 건 역시 고등학교 시절의 그게 컸죠.
● 그런 기분이 우선은 "노을빛 석양"에 그려져 있지요. 이런 표현이 자신의 표현이다, 같은 보람이 있었을텐데요.
처음으로 (보람이) 있었어요. 부모님에게 3년 유예를 받았을 때, 솔직히 전 3년으로 괜찮을까 생각했었거든요. 하지만 상경해서 바로 "노을빛 석양"이라는 곡을 만들었을 때, 이건 명곡이 나왔다고 생각했어요. 이건 이미 계약 차원이 아니라, 어디서 (데뷔의) 이야기가 와도 이상하지 않다는 상태가 돼서요. 그 점에서 안심했었고, 그 애한테 감사하고 있어요. 상어의 노래라던가 도마뱀의 노래라던가, 뭘 이야기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는 곡 뿐이었는데, 명확하게 "너"에 대한, 명확한 메시지송이라는 걸 처음으로 만들 수 있었으니까, 정말로 자신감을 갖게 됐어요. 뭐 데뷔 전 쯤까지는 줄곧 팽팽하게 당겨진 느낌이었어요. 1999년에 상경해서, 2004년정도까지. 그 애는 2년만에 도쿄를 떠났지만요, 전 도쿄에 남아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음악을 하지 않으면 더는 나아갈 수 없다는 게 있어서, 역시 계속 팽팽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죠. 그래서 메이져 데뷔를 하고, 왠지 그 애를 단념했어요. 이미 전 공략했다고 생각했고 다 이루었다고 생각해서요. 메이저 데뷔하고 나서는 물론 전혀 다른 고생이 섞여 들어왔지만.
● 하지만, 최근 "CHRONICLE"의 곡에도 열등감이나 뒤를 돌아보는 미련이 굉장히 드러나 있어요. 실제 시무라씨는 공부도 스포츠도 잘 하고, 발렌타인때는 여자아이들이 줄을 지어 있거나 했는데, 왜 그런 부분이 늘 따라다닌다고 생각합니까?
왜 그럴까요. 의식하지도 못했었고. 뭐 연애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요, 거기에 진짜 애정은 없다는 걸 이미 알았으니까요. 그렇잖아요. 정말로 좋아한다면 집 앞에 줄지어 서있진 않을 거 아냐, 같은거죠. 좀더 진심이 필요했던거죠. 그런 행사마다 편승하는 게 아니라 평범하게 고백해주는 애가 있다면, "아, 나 인기가 많은지도"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학원제나 발렌타인이나, 이벤트 때 그런 말을 듣는 게 많았으니까요. 그런 말을 듣는 까닭에, 거꾸로 "어차피 진심이 아니잖아?"같은, 열등감같은 게. "그렇다면 기대를 갖게 하지 마!"같은. 분명 원래 겁이 많은 인간인거죠. 예를 들면 제가 완전히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인간이었다면, 무언가에 온힘을 다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요, 딱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뭐 보통이었으니까요. 공기같은 인간이었던 거죠. 그 공기같은 인간에게 왜 흥미를 갖는건가 하는 열등감같은 게. 대체 내 어디가 좋은거지, 확실하게 말해줬음 좋겠다는 거죠. 그리고 확실하게 말해주는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단순히 그냥 사진을 찍어달라던가, 좀 사귀어달라던가, 가벼운 사람들 뿐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오히려 열등감이 생긴거죠. "여자애들은 뭘 보고 있는거지?" 같은.
● 언젠가 (정서적으로) 가득 채워진 가사가 나올까요.
어떨까요. 쓸 기분은 안 드는데요. 죽을 때에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좋으려나 생각은 하는데요. 앞으로 30년은 없지 않을까 싶은데 (웃음)
● (웃음) 어땠습니까? 28년을 이야기해보니.
글쎄요, 뭐, 타미오상 때문에 (웃음) 길을 잘못 들어서 이 업계에 들어온 거지만요, 무척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었으니까요. 차인 여자애도 무사히 다시 만날 수도 있고. 후지패브릭은 아마, 다음 앨범은 최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좋은 걸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사명감이 들어요-이제 곧 저는 29살이 됩니다만, 타미오 씨는 29살에 솔로가 돼서 "29"라는, 일본 록 사상 너무나 멋진 앨범을 만들었던 건데요. 전 후지패브릭이라는 밴드로 그걸 하려고 생각해요. 하지만 싸우고 솔로가 될지도 모르고 (웃음) 앞으로의 일은 모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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