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oove in the air/Fujifabric - MGZ

다빈치 2004-2014 후지패브릭 인터뷰 (야마우치)

서울소녀회 2014. 7. 19. 00:12

취재/글=요시다 다이스케, 편집부

사진=에모리 야스유키

 

  어느날, 4명이었던 밴드가 3명이 되었다. 곡을 만들고 가사를 쓰는 일은 일을 나누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래할 사람이 없었다. 인스트루멘틀 밴드가 되면 자신들이 만들었던 음악이, '그'가 남긴 말들이 과거에 봉인되어버린다. "내가 노래할게." 기타를 치고 있던 야마우치 소우이치로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가지고 태어난 크리스털같은 목소리를 감성적인 표현력으로 자유롭게 변화시키는, 보컬리스트로서 커다란 성장을 이루는 중이다. 그 성장이 작사작곡 능력에도 피드백을 주고 있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계속 될 음악에의 마음을 이야기해주었다.

 

처음 본 라이브에서 시무라군의 눈에 충격을 받았다


  ―――――― 후지패브릭 여러분을 <다빈치>에서 이전에도 취재했던 적이 있는데요, 이번 특집에서도 책 선정을 부탁드렸습니다! 주제는, "<야마우치 소우이치로를 만든 책>을 3권 골라주세요." 만화를 쭉 줄세워놓았네요.

  야마우치     세세하게 이거랑 이거에 이런 부분을 영향받았다고 하기 보다, '푹 빠져서 읽었다' '열중했다'는 경험이 제게 있어 컸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으로 빠졌던 만화가 초등학생 때 읽었던 <드래곤볼>인데요, 지금도 애니메이션 주제곡이 텔레비젼에서 흘러나오거나 하면 가슴이 들떠요. <이나중탁구부>는 요즘도 가끔 다시 읽으면서 웃고요.

  ―――――― 나머지 1권은 후지코·F·후지오의 단편집 <방주는 가득箱舟はいっぱい>입니다.

  야마우치     후지코선생님의 단편집 4권은 언제나 바로 다시 읽을 수 있게 화장실에 가져다 놨어요. (웃음) 전부 좋아하는데요, <방주는 가득>이라는 단편은 인간의 업이 알기 쉽게 표현되어있는 것 같다고 생각해서 골랐어요. 이건 벌써 20년 이상 읽고 있지 않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사람의 마음을 계속 움직이는 작품이라는 건, 무언가 만들고 있는 인간으로서는 동경의 대상입니다. 이상향이죠.

  ―――――― 어린 시절엔 만화를 읽는 것 외에 어떤 것들을 했었나요?

  야마우치     멍하게 있었어요... 전 사람이 말을 걸어도 대답을 하지 않았고, 소지품을 떨어뜨려도 줍지 않았고, 테스트도 백지상태였던 적이 많았어요. 아무것에도 흥미가 없어서. 어머니가 초조해할 정도로 무기력한 어린이었던거죠. 지금도 당시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는데요, 내내 '왜 학교에 가야만 하지?'라는 생각을 했고. 등교중에도 갑자기 돌아와버리니까, 아버지도 엄했기 때문에 굉장히 혼났었어요.

  ―――――― 지금 무대에 서서 노래하는 모습에서는 전혀 상상이 안 되네요.

  야마우치     맞아요, 그래서 당시를 알던 고향 친구들은 '용케 네가 앞에 나서거나 표현을 하는 게 되네' 라는 얘길 해요. (웃음) 하지만 뭐, 무기력이라는 건 역시 따분했던 거죠, 매일이. 그러던 차에 초등학교 5학년 때 축구를 시작해서요.  몰두할 수 있는 일이 생겨서 겨우 사람들하고 커뮤니케이션도 잘 할 수 있게 됐고...

  ―――――― 열정을 쏟을 수 있는 목표나 목적을 얻고 무기력에서 탈출했다.

  야마우치     장래에는 축구선수가 될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고등학교도 스포츠 추천으로 축구를 하기 위해 들어갔었는데, 금방 좌절했죠. 입학하자마자 "축구에 열정이 없어졌다"고 깨달아버려서... 쇼크였어요. 열등감에서 온 좌절때문이 아니라, "이걸 위해서 살아왔는데, 살아갈 목적이 없어졌다"고 알아버린 것이 가장 쇼크였어요. 하지만 중학교 3학년 때 기타를 만나고, 축구에 대해 품고 있던 열정을 전부 음악에 옮겨서 쏟아부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충격을 안겨주고, 이만큼이나 빠져들게 해준 음악에 대해서는 진지한 태도를 취해야겠다고 결심해서.

  ―――――― 그렇다면 난 음악으로 살아갈거야, 라는.

  야마우치     그렇죠. 아직 오사카 집에 살던 10대가 끝나갈 무렵부터 기타를 치는 일을 하거나 했어요. 당시 밴드가 공중분해돼버리고, 지인이 도쿄에 오지 않겠냐고 제안을 줘서 대학도 중퇴하고 상경했습니다. 그때부터 반년정도만에 (후지패브릭의) 모두하고 알게 되었기 때문에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 어떤 경위로 후지패브릭에 가입하게 됐나요?

  야마우치     매니저님한테 "기타를 찾고 있는 밴드가 있으니까"라면서 인디즈 초기에 발매했던 <아라카르트>라는 CD를 받았거든요. 그걸 듣고 70년대의 일본록이나, 레드 제플린, 비틀즈라던가, '조금 옛스러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고 있구나'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 후 라이브를 보러 갔는데요, 거기서 시무라군과 처음 만나서요. 그의 '눈'에 충격을 받았거든요. 또렷하게, 똑바로 객석쪽을 보고 있는 눈에 끌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있었어요. 다른 멤버들도 개성적이라 앙상블도 굉장히 좋았고요. 하지만 저는 제가 가입하기 전의 앙상블이 취향이었죠. 그래서 "(기타는)필요없어"라고 본인한테 말했어요. 하지만 시무라군은 "아니, 필요한데요"라고 (웃음) "그럼, 일단 스튜디오에 들어가볼까요"라는 게 됐고... 들어간 거죠.



<젊은이의 모든 것 若者のすべて>의 가사는 도달하고 싶은 목표 중 하나



  ―――――― 가입직후의 2004년 4월에, <벚꽃의 계절>로 메이저 데뷔. 11월에는 첫 앨범 <후지패브릭>이 발매되었으니까, 질풍노도의 나날들이었겠네요.

  야마우치     야단법석이었죠.(웃음) 기대를 걸고 있었던 만큼 압박도 느끼고 있었고, 보컬인 시무라군이 시작했던 밴드였으니까 그 스스로의 압박은 역시 상당히 컸을 거라고 생각해요. 데뷔는 '산뜻하게 됐다'는 느낌이었지만, 첫 앨범에 관해서는 저희들의 "첫번째 작품"이라는 의미를 짊어질대로 짊어져서, 매일 스튜디오에 들어가 열중해서 곡을 만들고 있었죠. 다같이 항상 얘기했던 건 "계속 들을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싶어"였어요.

  ―――――― 방금 책에 관해서 이야기하신 것과 같네요.

  야마우치     맞아요. 잘 되지 않았나 싶어요. 저는 지금도 첫앨범을 듣고 있고, 라이브에서 연주해도 정말로 좋은 곡들 뿐이라고 생각해요. 아마 10년전부터 지금까지를 관통하는 '후지패브릭다운 음악'이라는 것이, 확실히 말로 하기는 어렵지만,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건 분명히 일부러 구해서 손에 넣을 순 있는 건 아니고요. 곡을 만들고 있는 저희들이 '왠지 평범한데'라고 생각한 걸 거스르는 때 생기는 것이 '후지패브릭다운 음악'이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 데뷔 이후 <춘하추동>을 테마로 한 싱글이 연속 릴리즈되었습니다. 이 기획은 어디서 출발했었나요?

  야마우치     레코드 회사 쪽이었던 거 같아요. 역시 시무라군이 쓰는 가사라던가 멜로디는 풍경이 떠오른달까, 출신지는 그가 야마나시고 제가 오사카니까 보고 자란 풍경이나 지나쳐간 계절감은 완전히 다를텐데도 '우리 동네를 노래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었죠.

  ―――――― 소위 "공감"이군요. 하지만 '평범한 것을 거스르'면서 공감을 낳는 건 굉장하네요.

  야마우치     그렇죠. 하지만 이건 정말 그였기 때문에야말로 가지고 있던 거라고 생각해요. 후지패브릭의 음악에 노스탤지어를 느낀다고 말씀해주시는 분들이 많은 건 시무라군의 '말'인 가사가, 가장 커다란 요인이라고 생각해요.

  ―――――― 05년 11월에 두번째 앨범 <FAB FOX>가 발매되어, 06년에 히비야 야외음악당에서 첫 원맨 라이브, 시부야공회당에서 첫 홀 원맨라이브를 이어갑니다.

  야마우치     이 즈음엔 라이브를 잔뜩 했었죠. 25살 나름의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그루브감이 드러났던건 아닐까요 (웃음) 300명이 들어가는 라이브하우스를 가득 채울 수 없을 것 같던 밴드가 1000명을 넘겼다, 2000명을 넘겼다, 라는 스텝업의 기쁨도 느낄 수 있었던 시기로... 하지만, 지금도 그렇지만요, 줄곧 꽤나 힘껏 버티고 있는 느낌이에요. (웃음)

  ―――――― 07년은 11월에 싱글 <젊은이의 모든 것>이 릴리즈되고, 08년 1월에 세번째 앨범 <TEENAGER>를 발표. <젊은이의 모든 것>은 팬으로부터 내내 사랑받고 있는 명반이죠.

  야마우치     <젊은이의 모든 것>은 다같이 스튜디오에 들어가서 몇개나 되는 패턴을 편곡해서 만들었어요. 지금의 편곡으로 하기로 결정된 다음에 시무라군이 가사를 썼는데요, 후렴의 '없을까 없겠지' '분명히 없겠지' 라는 프레이즈를 듣고, 저는 '후지패브릭으로서의 존재의의가 있는 곡이 될거야'라고 생각했어요. 여성에 대한 기대감이나, 사랑하는 기분을 표현하는 곡은 많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표현을 하는 곡은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시무라군이 사라진 뒤, 저도 가사를 쓰게 되면서부터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말로 표현해야한다'고 평상시부터 노력하고 있지만, <젊은이의 모든 것>에는 그게 있으니까... 굉장히 보람을 느꼈던 곡입니다.



3명이서 해나가기로 결정했다

'내가 노래할게'라고 말했다


  ―――――― 09년 5월에 네번째 앨범 <CHRONICLE>이 릴리즈됩니다. 전곡이 스웨덴에서 녹음되었다고 하죠.

  야마우치     3주동안 매일 호텔과 스튜디오를 왕복하는 '스웨덴 합숙'같은 느낌이었어요. 하나 전의 <TEENAGER>는 함께 곡을 가져와 만든 앨범으로 팝적인 요소에도 도전했던 작품이었는데요. 그걸 만듬으로써 시무라군 속에서 개인적인 요소가 나왔고, <CHRONICLE>이라는 앨범이 태어났다고 생각해요.

  ―――――― 그리고 그 앨범이 발매된 해의 12월. 레이블 이적 발표 전에 시무라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야마우치     레이블을 옮기는 일로 사전회의도 하고, 새로운 앨범의 '곡꺼내기曲出し'도 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시무라군이 사라졌기 때문에 순식간에 눈 앞이 보이지 않게 됐고, 보려고도 하지 않았었어요. '밴드를 어떻게 할 지는 바로 생각할 수가 없다' '아무튼 정해져 있는 일만 해보자'라고 생각해서... 시무라군의 꿈이었습니다만, 10년 7월에 후지큐 하이랜드에서 라이브 ('후지후지후지Q')를 개최하는 것이 결정되어 있었거든요. 같은 타이밍에 앨범을 1장 내는 것도. 그러니까 지금부터 어떻게 할지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이거야말로 사명감이랄까, 아무튼 라이브를 실현시키는 일만 생각하려고 달려들었어요. 세상을 떠났다니, 지금도 이해를 할 수가 없고, 받아들이려고 하는 건 있지만 그걸 어떻게 하려고 한다기보다는, 그것이 현실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예정된 일들이 없었다면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냈을 뿐일 거란 기분도 들어요.

  ―――――― <후지후지후지Q>는 시무라씨가 남긴 곡을 3명이 연주하고, 쟁쟁한 게스트 보컬들이 노래를 부르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시무라상이 멜로디와 원 프레이즈만을 녹음했던 데모를 <만나러会いに>라는 타이틀로 3명이 완성시킨 '신곡'을 선보입니다. 이 곡으로 처음 야마우치씨가 보컬을 맡았습니다.

  야마우치     마이크 앞에 섰을 땐 제 심장 소리가 들렸어요. <만나러>를 부르는 건 타임테이블의 마지막이었으니까 '이걸 부르면 라이브는 끝난다!'라고 각오를 굳게 다졌을텐데도, 수많은 사람들의 앞이었기 때문에 부담을 느껴서요. 혼이 빠져나가는 느낌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일단 해내려고. 그 후, <후지후지후지Q>가 끝난 뒤쯤부터 밥도 못 먹을 정도의 피로감도 있었고, 탈력감도 있었고요, '무언가 하나 끝났다'라는 기분이 되었어요. 어떻게 살아가야할지를 가장 고민했던 시기이기도 했다고 생각해요.

  ―――――― 시무라씨가 남긴 음원을 기초로 3명이서 완성시킨 다섯번째 앨범 <MUSIC> 완성 후, 8개월정도 시간이 빕니다. 그리고 11년 4월에, 3인체제로의 활동지속을 발표합니다.

  야마우치     그 기간에는 한달에 한번정도 모여서 3명이서 계속 이야기를 나눴어요. 후지패브릭 자체를 계속한다는 결론에 다다른 뒤에도, 게스트보컬을 초대해서 인스트루멘틀 밴드로서 계속해가는 방법도 고려했었어요. 하지만 <후지후지후지Q>에서 다른 밴드를 가까이서 접하고, 거기에 독특한 공기나 사운드가 있거나 언어가 있거나, 음악에 대한 자세가 있는 것을 보고있으려니 '우리들 후지패브릭에도 그런 공기가 있다'고 많이 느껴서요. '그런 후지패브릭만의 음악이나 언어를 잃고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래서 3명이서 해나가자고 생각했어요. 그랬더니 노래가 없으면 안 되잖아요. '부를 수 있다면 불러야겠다'는 기분으로 두사람의 앞에서 '내가 노래할게'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두사람이 '불러 불러どうぞどうぞ'라고. 

  ―――――― 타조 구락부 같네요 (웃음)

  야마우치     '아니, 역시 내가!'는 아니었지만요 (웃음) 거기서부터 다음 앨범의 제작에 들어갔어요. 3명이 각각 만들어 온 것을 모아서 1장으로 만든 여섯번째 앨범이 <STAR>였어요.

  ―――――― 표제곡은 야마우치씨 작곡, 야마우치씨와 카토씨 공동작사입니다. 파워풀한 곡이지요.

  야마우치     그 곡은 무언가 만들어지기 전의, 최초의 폭발같은 곡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미지로서는 빅뱅이랄까, 슈퍼노바. 이제부터 무언가를 '작렬시키고 싶다!'는 기분이 그 곡에는 굉장히 드러나있다고 생각해요. <STAR>는 내~내 높은 키로 노래하고 있거든요. 지금 보면 '너 시끄러워!'라는 느낌이 듭니다만(웃음), 하지만 그때는 이제 이것밖에 없다!라고 생각했었어요. 그건 그만큼 폭발이라는 걸 전하고 싶었던 걸까 싶습니다.

계속해나가고 있기 때문에야말로 느낄 수 있다


  ―――――― 현재 '프론트맨'이라고 불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말을 듣는 것에 불안이나 긴장같은 것은...
  야마우치     아니 그게, 지금도 엄청 느껴요. 프론트맨이라는 건 밴드의 아이콘이랄까. 노래를 부른다는 건 '이런 식으로 전하고 싶다'를 말로 하는, 가장 알기 쉬운 수단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역시 노래를 부르는 일에는 책임이 있고, 또 '프론트맨'이라는 건 타고난  성격도 뭔가 드러나는 거구나 싶고. 
  ―――――― 12년부터 13년에 걸쳐서는 라이브 투어의 해였던가요.
  야마우치     가능한 한 많은 라이브를 하고 싶다고 제 쪽에서 말했어요.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일에 익숙해지고 싶다는 것도 있었고, 음원제작과 라이브는 안팎으로 하나거든요. 관객들 앞에서 선보일때마다 곡이 성장해가는 거죠. 그걸 스스로의 피부로 느끼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고, 다음엔 이런 걸 말하고싶다, 이런 곡을 하고 싶다, 이런 프레이즈를 연주하고 싶다는 욕구도 끓어오르거든요.
  ―――――― MC도 담당하고 계시죠.

  야마우치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아직 모르겠어요...MC에 따라서는 다음 곡에의 기대감을 높여주거나 곡을 듣는 방법을 변화시키거나 해버리니까. 스테이지에서 이야기하는 게 이렇게 어렵고 이렇게 중요한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노래부르는 일에 대해서는, 지금은 정말 즐거워서 어쩔줄 모르겠을 뿐이지만요. 저는 원래 기타를 쳤었고 노래를 부르던 게 아니었기 때문에 제 노래를 들어주는 사람이 '와-!'라고 해주는 것 만으로도 울만큼 기쁘거든요. 거짓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정말로 그 덕분에 지금까지 계속해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 라이브에서는 시무라씨가 불렀던 노래들도 야마우치씨가 부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것으로서 목소리를 낸다는 의식이 있나요?

  야마우치     그것도 가끔 생각하는데요, 원래 제가 부르지 않았던 곡에 대해서는 그만큼 연습을 해요, 굉장히 많이. 제가 제 스스로의 언어로 나타낼 수 있도록 몇번이나 횟수를 거듭해서 부르거나 듣거나 해요.  그 곡을 듣는 분이 곡의 언어에 대해 오해를 낳지 않도록 하고 싶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제 것이 되는 거냐고 한다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제가 부르고 있는 곡도 만든 곡도, 말하자면 후지패브릭의 곡은 역시 들어주시는 그 분들의 것이 된다고, 특히 라이브에서 느껴요. 그러니까 저희의 곡은 '자신들만의 것이 아닌' '여러분의 것입니다'라는 식으로 확실히 말하고 싶어요.

  ―――――― 후지패브릭으로서, 야마우치씨가 노래부르는 것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듣고 계신 것은 아닌가요?

  야마우치     뭐, 어쩔 수 없으니까요. 그래도 들어주시는구나하고, 그것만으로도 기쁘죠. ...하지만요, 겨우 즐거워지고 있어요. 지금, 굉장히 즐거워요.

  ―――――― <STAR>로 '폭발'한 뒤에 싱글 발매가 이어져 13년 3월에 일곱번째 앨범 <VOYAGER>가 도착했습니다.

  야마우치     '폭발'이 있은 뒤에는 흩어지기 마련이니까요 (웃음) 하고싶은 것이 무수하게 많이 나왔어요. 닥치는대로 일단 해보고, 그게 한장 한장 싱글이 되어서요. 그리고 앨범으로서 하나로 패키지할 수 있었다는 건 굉장히 보람이 있었죠. 서서히 저희 나름의 새로운 방향성이 나왔다고 생각해요.
  ―――――― 올해 2월에는 싱글 <LIFE>가 발표되었습니다. 이 곡은 야마우치씨가 작사작곡하셨는데요, 남모르게 신경지에 이르렀죠.

  야마우치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것이 기뻐요. '폭발'로 흩어진 조각을 모으려고 했던 <VOYAGER> 후, 무척 솔직한 기분이 들었어요.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쉽게 표현해보면 어떨까 생각해서 쓴 것이 이 곡이에요. 다음 앨범은 전곡 <LIFE>같은 느낌이네요. 무지 좋은 앨범이 될거라고 생각해요.

  ―――――― 올해로 데뷔 10주년을 맞아 11월에는 첫 부도칸 원맨 라이브가 개최됩니다. 지금의 기분을 들려주세요.

  야마우치     부도칸에서는 후지패브릭에게 있어서의 10년을 제대로,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보여줄 수 있는 하루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똑똑히 돌아보고, 똑똑히 지금을 보시고, 똑똑히 미래를 보실 수 있는 하루로 만들기에 안성맞춤의 장소에요.

  ―――――― 마지막 질문입니다. 지금의 야마우치씨와 후지패브릭에게 있어 시무라씨는 어떤 존재입니까?

  야마우치     '옛날 친구'같은 느낌이 들지 않아요. 지금도 밴드 멤버로서 저희들 곁에 계속 존재하고 있다고 할까, 저희들이 이 밴드를 계속해나가고 있기 때문에야말로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 밴드명으로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데 그게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몰라요.

  ―――――― 앞으로의 후지패브릭의 활약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야마우치     마침 어제 다음 앨범의 보컬 녹음이 있었는데요. 이게 또 좋은 곡이에요. (웃음) 앨범의 투어도 스스로가 노래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솔직하게, 그대로의 언어를 노래로서 전달할 수 있도록 지금 정진하고 있는데요, 그게 가능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무엇보다 많은 분들이 들어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그건 데뷔 때부터 변하지 않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계속 들을 수 있을 음악을 앞으로도 쭉 만들어나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