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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패브릭 7
Katayose Akito
2010年7月16日
08:28
<은하>를 마지막으로 후지패브릭의 프로듀서에서 물러난 것이 쓸쓸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프로듀서로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던 나는 같은 멤버가 된 심정으로 전심전력을 기울이는 것밖에 방법을 몰랐다.
내게 있어 첫 전면 프로듀스, 그것도 거의 1년에 걸친 밀접한 작업을 함께하여 여러 상념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좀더 할 수 있는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하고싶은 것의 아이디어도 산처럼 쌓여있었다. 마음 속 어딘가에서, 몇년이라도, 몇장이라도 같이 음악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어쩐지 예감은 하고 있었다. 시무라군은 내 곁을 떠나 다음 스테이지로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표현하고 싶은 음악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걸 여러 재능이 있는 사람들과 시험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물론, 그들에게는 셀프 프로듀스를 할 수 있는 재능도 있고, 그것이 언제라도 가능하도록 나는 이런저런 지식이나, 가진 모든 것을 그들에게 건네주었던 것이 아닌가.
음악은 뮤지션의 것이지, 결코 프로듀서의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인생의 한 순간에서 교차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고보니, 디렉터 이마무라군으로부터 시무라군이 코넬리우스의 오야마다군에게 프로듀스를 부탁하고 싶어한다며 의논을 구하는 전화를 받았던 일도 있었다.
시무라군과 오야마다군의 매칭이 어떻게 굴러갈 것인가, 나는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으나 어느 쪽이든 의심의 여지 없는 천재이다.
오야마다군과는 오래된 친구사이이고, 쇼콜라의 소속 사무소는 오야마다군의 사무소이기도 했다.
나는 기쁘게 소개해주었는데, 당시 오야마다군은 <SENSUOUS>의 레코딩 중이기도 했고, 유감스럽게도 이 얘기는 성사되지 않았다. 혹시 실현됐더라면 어떤 음악이 되었을 것인가!
분명 당시의 시무라군은 미디, 시퀀서 등 컴퓨터의 DTM을 사용하여 만드는 음악에 상당히 흥미가 있었던 것 같다. 스스로도 그 노하우를 공부하고 싶다고 강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데뷔 직전에 모인 멤버로 이상적인 밴드사운드를 구축하느라 고생한 1년을 거치며, 전부를 자기 한사람의 힘으로 표현한 데모를 만들 수 없다면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는 사운드를 멤버들에게 영원히 이해받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두번째 앨범 <FAB FOX>의 여러곡에서 당시 슈퍼카의 프로듀스 등으로 주목을 받고 있던 마스코 타츠키씨에게 믹싱을 의뢰한 것도, 그런 것들을 배우고 싶은 시무라군의 의향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점에서 나는 미디, 시퀀서 등의 전문가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고, 게다가 그 즈음은 오히려 시대를 역행하는 건가 싶게 컴퓨터를 일절 사용하지 않는, 테이프로 하는 녹음에 흥미를 가지고 있던 시절이었다.
나는 모든 집착을 내려놓고, 후지패브릭을 잊고 다시 스스로의 길을 걸어가기로 결심했다.
2005년 2월, Great3의 매니저를 오랫동안 맡아주었던 시노라는 남자가 돌연 이 세상을 떠났다. 우리들 멤버 세명은 관 앞에서 크게 흐느꼈다.
그 일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으나, 이 날을 마지막으로 Great3의 활동은 오늘까지 스톱된 채이다.
나는 아내인 쇼콜라와 Chocolat & Akito라는 유닛을 결성하여 초심으로 돌아가 스스로의 음악을 계속했다. 거기서는 아날로그 테이프에 의한 레코딩의 가능성과, 후지패브릭과의 레코딩으로 촉발된 하모니의 흥미로움을 힘껏 추구했다.
믹스는 시카고에 사는 오랜 벗, Tortoise의 존 맥킨타이어의 스튜디오까지 가져가, 70년대의 낡은 Trident 탁자에서 믹싱을 했다.
난 어느샌가 스스로의 앨범도 객관적인 프로듀서의 시선에서 다양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Great 3 시대에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일이다.
시카고에서는 다시 존 맥킨타이어와 긴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어 프로듀스에 필요한 한층 많은 지식을 얻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철저한 아날로그 레코딩을 추구했기에 그 질감도 몸에 두드려넣어졌다.
그 후에는 디지털 레코딩에서도 아날로그 취향의 질감을 정교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어, 마침내 현재는 임기응변으로 디지털에서 아날로그까지 어떤 스타일이라도 마음먹은대로 레코딩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지금'에 집중하고 있던 덕분에, 나는 후지패브릭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 즈음, 자택에 그들의 새 싱글 <무지개>가 도착했다. 이 멤버들로 첫 셀프 프로듀스작이다.
서둘러 들어보고 과연 그렇군! 이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후지패브릭의 멜로디와 사운드가 확실히 거기에 있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이곡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또 다른 것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여기에는 그들 다섯명이서밖에 만들 수 없었던 사운드가 있다.
나는 <무지개>가 좋았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후지패브릭의 팬이니까 힘내! 라고 시무라군에게 메일을 보내고 자신의 세계로 돌아갔다.
그러던 어느날, 디렉터 이마무라군에게서 오랜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 후지패브릭으로 존 레논의 곡을 트리뷰트하게 되었거든요. 그 곡을 시무라가 카타요세씨한테 프로듀스 받고싶다고 하고 있는데, 스케쥴 비어있어요?' '당연히 기쁘게 해야지!' 나는 즉답했다.
곡은 <LOVE>로 결정되어 있었다. 나는 대략의 편곡 아이디어를 가지고 멤버들이 기다리는 리허설용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사실 후지패브릭과 커버곡을 하는 건 두번째였다. 첫번째는 첫앨범 레코딩 중, FM프로그램 기획으로 고다이고의 <몽키매직>을 함께 연주했던 것이다. (이 음원은 지난번 발매된 <FAB BOX>에 수록되어 있다) 그때는 프로그램 용 음원이라 예산에도 시간에도 한계가 있어, 하루만에 연주, 노래, 믹싱까지 전부 진행한 탓에 충분히 편곡할 여유도 없이 거의 카피라 할 버젼으로 도전했었다.
존 레논의 오리지날은 피아노와 어쿠스틱 기타의 언플러그드로 연주된 <LOVE>였지만 나는 후지패브릭 버전 편곡의 중심에 드럼과 플로어탐을 사용한 비트를 놓았다. 우연히도 이 곡은 메이저 초기 후지패브릭의 드러머 아다치군이 후지패브릭과 연주한 마지막 곡이 되었다. 그것을 나는 아직 몰랐지만, 아마 이미 그때 아다치군의 탈퇴는 결정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멤버들의 모습은 1년전과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그리운 얼굴들이 모두 모였다. 내가 보기에 시무라군은 결과적으로 전편 셀프 프로듀싱이 된 두번째 앨범 <FAB FOX>에 영혼을 전부 쏟아버린 듯 했다.
아마 그에게 트리뷰트 앨범의 곡까지 프로듀싱할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던 탓에 나를 불렀을 것이다. 이유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역시 그들과의 레코딩은 즐거웠다.
<LOVE>의 엔지니어로는 멤버들과 동년배로 당시 약관 25세였던 신예 엔지니어, 우라모토 마사시 군을 불렀다. 그의 이름은 <아지랑이> MIX 때, 다카야마군에게 '누군가 젊은 어시스턴트 엔지니어 중에 재능 있는 애 없을까?'라고 물어봤을 때 이름이 거론되어 그 후 소개받은 이래 한번 같이 일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젊은이었다. 그 정보를 나는 시무라군에게도 전했던 적도 있어, 우라모토군은 <FAB FOX>레코딩에도 참가했었다.
당시 우라모토군은 요즘 젊은이임에도 불구하고 쿠루리의 레코딩에서 다카야마군의 어시스턴트로 붙어 옛날의 아날로그 레코딩을 심도있게 경험한 적도 있었고, 상당한 아날로그 녹음 매니아로 테이프 신봉자였기에 그때의 내 경향과 상성도 딱 맞았다.
앨범 <후지패브릭>에서도 드럼과 베이스는 전부 아날로그 테이프로 녹음한 것을 컴퓨터에 재생시켜 두꺼운 사운드를 얻었었는데, 나아가 우리들은 <LOVE>에서는 악기 전부를 아날로그 테이프로 녹음하기로 결정했다.
이건 만약 연주를 틀려도 컴퓨터와는 달리 나중에 세세한 수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오랜만에 듣는 후지패브릭의 연주는 한층 뛰어나게 진화해있었다.
특히 소우군의 장대하고 소용돌이치는 듯한 기타는 압권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앨범 <후지패브릭>에서의 철야에 철야를 거듭한 레코딩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불과 몇시간만에 훌륭한 테이크가 녹음되어버린 것이다.
우라모토군의 얼핏 사이키델릭한 향기가 감도는, 영상적이고 이미지네이티브한 믹스도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때의 그의 작업이 마음에 들었던 나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라모토군을 나의 프로듀스 워크의 오른팔로 몇번이나 참가시키고 있다. 그는 나와 함께 공부하고, 같이 정진을 거듭해온 동지 중 한명이다. 나와의 일 외에도 두드러지게 성장한 그는, 최근에 사카낙션과 훌륭한 사운드를 만들고 있는 것도 기대할 만 하다.
시무라군도 이 레코딩에서는 <FAB FOX>의 압박에서 해방되어 제법 긴장을 풀고 있었다. 레코딩 후에는 드물게 그에게서 감사의 마음을 담은 긴 메일을 받아 쑥쓰러웠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LOVE>는 에필로그에 상응하여, 아무런 스트레스도 없이 다들 웃는 얼굴로 서로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었던 레코딩이었다. 그리고 결국 이것이 나와 시무라군과의 마지막 레코딩이 되어버렸다.
이상하게도 시무라군은 내가 프로듀서를 그만둔 이후에 사생활에서 빈번하게 전화를 걸거나, 자택으로도 놀러오거나 하게 되었다. 그런 건 프로듀스를 하고 있었을 때에는 한번도 없었던 일이다. 아다치군도 탈퇴 후에 집에 놀러온 적이 있는데, 그도 또 탈퇴 후가 오히려 시무라군과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이가 됐다고 이야기했었다.
늦은 밤에 전화가 울리면 십중팔구는 시무라군이었다.
그리고 우리집에 놀러오고싶다고 말할 때는 대체로 뭔가 고민스러운 일이 있을 때였다.
시무라군과의 약속장소는 언제나 역 앞의 공터였다. 내가 마중하러 가면 언제나 그는 큰 백팩을 메고 가드레일에 걸터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역 앞의 돈코츠 라멘이 신경쓰이는지 '맛있어보이네요~'라고 말하는 것이 관례였다.
나는 '고기를 안 먹어서 라멘집에도 안 가니까 몰라'라고 매번 대답했다.
나는 레코드를 좋아해서, 집에도 수천장의 레코드를 수납한 장이 있다. 시무라군은 처음 집에 왔을 때 '생각한거보다 레코드가 적네요. 후지요시다의 지인 중에 더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한테 브라질 음악이나 여러가지를 배웠거든요. 카타요세 씨랑 그 사람을 만나게 해주고 싶네요' 라고 이야기했다.
집에 오기는 와도 특별히 뭘 하는 것도 아니고, 대체로 내가 그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음악이나 DVD를 둘이서만 내내 듣거나, 보거나 할 뿐이었다.
놀러와도 텐션이 낮을 때도 있어서 그럴 때는 '이녀석 별로 재미가 없는건가?'라고 생각하거나 했지만, 돌아간 후에 핸드폰에 도착한 메일을 보니 '최고로 재밌었어요!! 금방 또 놀러갈게요!!'라고 언제나 '!!' 투성이의 메일을 보내오거나 하니까, 나는 그의 반응은 일절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TEENAGER>가 완성된 직후, 내가 들어주었으면 한다며 갓 리마스터링한 CD를 가지고 온 적도 있었다.
둘이서 소파에 나란히 앉아, 1곡마다 짧은 감상을 섞어가며 진지하게 전곡을 들었다. 잊을 수 없는 것은 <젊은이의 모든 것>이 흘러나왔을 때. 무심코 소름이 돋았다. '시무라군, 해냈구나.'라고 생각했다.
'이건 명곡이야' 나는 조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숨기고, 시무라군에게 '봐봐, 소름 돋은거'라고 하면서 그에게 팔뚝을 내밀었다. 시무라군은 '고맙습니다' 하고 기쁜 듯이 미소지었다.
분명 그는 '대가 없는 사랑'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다.
내 쪽으로도, 언제나 칭찬받고 싶어서 놀러왔던 것이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더이상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얼마나 그의 재능을 높게 사고 있는지, 좋은 점만을 몇번이라도 계속 이야기할 수 있었다.
표현을 생업으로 하는 한 주위 사람으로부터 여러가지 이야기를 듣는 것은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간단하니까, 아무나 하고 싶은 말을 한다.
나도 완전히 똑같으니까 정말 잘 아는 거지만, 시무라군은 자신의 재능에 굉장한 자신감이 있는 반면,
그 이상으로 전혀 자신감이 없었다.
그는 그렇게나 재능이 있는데도 언제나 불안과 싸우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곡이 안 써지면 금방 레이블이나 사무소로부터 계약이 끊기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만큼이나 CD를 팔고, 라이브 동원도 계속 늘어가고 있었으니까, 그런 걱정은 기우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내게는 스스로 자신을 몰아넣는 듯이도 보였다. 그럴 때, 나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걱정마, 천재니까!' 라고 격려해주고, 곡을 쓰는데 자극이 될만한 음악을 많이 들려주는 것, 그리고 집에서 맛있고 영양 있는 식사를 많이 먹게 해주는 것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그는 일 관련 말고도 많은 고민을 털어놓고 여러가지를 상담해왔다.
몹시도 괴로운 듯한 모습을, 도저히 보고 있기 힘들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언제나 '한번 더 프로듀서를 맡겨달라'라는 말이 목끝까지 차올랐다.
경험을 쌓은 지금이라면, 그때보다 더 그의 생각대로 사운드를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렇게 자기 혼자서만 죄다 짊어지지 말고, 내게도 조금 나눠줘.
그렇게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내가 그것을 말로 하는 일은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는 언제나 시무라군을 역까지 바래다줬다. 집에서 역까지는 도쿄 도심치고는 상당히 한가로워서, 가로등 아래를 박쥐가 날아다니거나, 때때로 3량 편성의 작은 전차가 옆을 스쳐지나갈 뿐인 길이었다.
시무라군은 '이 주변의 분위기 좋네요. 뭔가 조금 고향이 생각나는 느낌이에요'라고 말하고 웃었다.
<CHRONICLE> 레코딩 전 마지막으로 그가 집에 놀러온 날 돌아갈 때, 우리들은 달빛 아래, 언제나처럼 아무말없이 선로 옆길을 역까지 걸었다.
'언젠가 또 같이 뭔가 해보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입을 뗐다.
'그러게요'
라고 시무라군은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 말의 뉘앙스에서 혹시 언젠가 그 날이 온다 해도 한참 뒤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설마 그 꿈을 영원히 빼앗겨버리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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